창문을 보니 어스름하고 푸르뎅뎅하다. 문교와는 계속 얼굴을 보기로 했지만 이전같은 일반적인 연애의 형태를 띄고 있지는 않다. 나도 또라이지만 이 새끼도 제정신은 아닌 것 같다.
나는 이상한 인간이다. 이상하지 않은 인간이 보기에는 언뜻 비슷한 양상을 띄는 것처럼 보일 수는 있겠지만 이상한 인간끼리 붙여놔도 어차피 서로를 이상하다고 생각한다. 간극은 절대로 좁혀지지 않고 이해의 부재는 계속 된다. 그래서 인간들은 모두 외롭다고 말할 수 있다.
다시 창문을 흘끗 들여다보니 그새 앞전보다 밝아졌다. 고작 5분밖에 지나지 않았는데 이상해-. 눈이 무겁다. 이대로 뜨지 않기를 바라보지만 소용은 없을 것이다. 사실 죽는 걸 진심으로 바란 적도 없거든. 죽어버리면 내가 바라던 모든 것들이 어떻게 이뤄지거나 어떻게 무너져 내리는지 알 수가 없잖아?
난 호기심이 많다. 모든 것들을 골똘히 생각하며 시간을 허비하곤 한다. 그러다보면 항상 결말이 죽음으로 이어졌다. 삶은 죽음과 가장 밀접하다는 게 내가 최근에 찾은 답이다. 완벽한 정답은 아니라서 기분이 그리 유쾌하진 않았다. 역시 답을 내가 직접 내리는 수밖에 없나.
조금 더 따뜻한 사람이 되고 싶은데 나한텐 그게 좀 어렵다. 따뜻해질 방법을 모르는 것 같기도, 따뜻해질 용기가 없는 것 같기도 하다. 나만을 생각하며 살아가는 것이 관성 때문에도, 그냥 세상 살기에도 훨씬 편할 것 같은데 내가 부족한 부분이라 그런지 다른 사람을 헤아리는 능력을 가진 사람이 대단해 보이고 닮고 싶은 것 같다. 다정한 말을 건네고 싶지만 상대방이 듣기에 어떨 지 몰라 어떤 말을 해야할 지 모르겠고, 내가 이런 말을 해도 되는 건가 싶어 그냥 입을 다물고 있게 된다. 엄마는 따뜻해지려면 역지사지의 마음을 가지면 되지 않을까 말해주었는데, 나는 그게 자연스럽게 되는 사람은 아닌가보다. 다들 노력하고 있는 거겠지? 나도 좀더 노력해 봐야겠다.
스무 살의 준서는 모로코 교포이다. 그는 유년 시절을 모로코와 프랑스에서만 보냈다. 이곳에서는 모두 준서를 한국인으로 바라봤지만, 정작 그는 한국에 대한 기억이 전혀 없었다. 그는 자신을 한국에서 온 이방인으로 규정하는 시선이 싫었다. 현지인이 되고, 몸 담고 있는 사회의 주류가 되고 싶었다. 그래서 그는 늘 가 본 적도 없는 한국을 자신이 있어야 할 세계라고 생각했다. 그는 K-드라마를 통해 한국을 접하며 한국에 대한 환상을 키워나간다. 마침내 그토록 꿈꾸던 서울의 대학생이 된 그는, 자신을 매혹했던 환상을 찾아 서울을 방황하기 시작한다. 신촌의 캠퍼스부터, 홍대 번화가, 그리고 촛불로 가득한 광화문 광장까지. 서울은 진짜 그가 바라던 마음의 고향이 될 수 있을까.
나는 ‘왜?’라는 질문이 머릿속에서 가장 먼저 떠오르고 이유를 찾는 게 당연하다. 그 이유를 잘 찾는 사람이기 때문이 아니라 잘 모르기 때문인 것 같다. 그래서 연결 짓고 답이 없는 경우는 샤머니즘 따위의 미신 망상에서 이유를 찾기도 한다. 그게 없는 이유도 만들어 주기도 하니까.
이러한 생각의 꼬리물기는 나를 갉아먹는 날도 있다. 하지만 나만큼 생각도 안 해보는 것은 너무나도 짧은 생각이 아닐까 아쉬울 것 같다. 여기서 더 많이 꼬리를 물어본 사람은 나보다 더한 답들과 다양한 생각의 경험으로 답을 찾아가지 않을까?
그 답을 경험해 보는 게 내가 생각을 하는 이유고 질문에 중독되는 일인 거 같다.
요즘의 생각들 사이사이에 끼어드는 또 다른 생각은 혼자서만 느끼는 부담감과 혼자서만 아는 부족함, 내 체력으로 한계를 측정하는 습관이 보인 것이다. 이 습관이 강력해지게 되는 순간들은 소통에서의 불필요한 나의 꼬리 물기 때문이다. 탐구해야 할 것에서 꼬리물기가 아닌 그 복잡하고 철학적인 인간관계에서의 행동과 감정들에서 근거를 찾으려 하니, 깔끔한 결론이 내려지지 않고 불필요하고 부정적인 감정만 남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내린 결론이 있다.
사람한테서, 사람과의 소통에서 예를 들면 인스타그램, 각종 SNS, 스마트폰으로 불필요하게 이어나가는 소통들에 꼬리를 무는 것을 멈추자 SNS를 끊자는 것은 아니다. 가만히 있어도 나에게 유익한 정보나 반가운 소통, 영감도 풍부하게 제공해 주니,, 그보다는 필수적으로 대면했을 때도 느끼는 감정들을 혼자만의 시간에서 느끼고싶지 않으니 어느정도 거리를 두자는 것이다.
‘나도 하고 싶다.’
‘저렇게 말하는 이유가 뭘까?’
‘나는 왜 이러고 있지?’
이런 생각은 인생에서 중요한 시점에 몇 번만 생각하는 걸로도 충분한 것 같다. 하루에도 수 백번 들게 해선 안되는 질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터넷 속에서 나는 점심시간 전 배고픔처럼 이 질문이 머릿속에 둥둥 떠다니고 비교하고 한계를 짓게 된다.
차라리 드라마나 영화를 보고 의문을 품자면, 나와 연결되지 않은 다른 세상의 질문을 던지면, 나에게 남는 감정들은 빙빙 돌지 않고 대강 내린 답으로 축적되어 금방 사라진다. (대강이라고 해서 나쁜 게 아니다. 빠르고 정확하게 내려진 답일 수도 있으니) + (사라진다는 것은 아예 없어지는 게 아니라 일상에서 잊다가도 필요할 때 꺼내질 수 있음을 생각했다.)
이러한 답을 내리게 되는 과정에도 나는 아마 몇천 번의 질문을 통했을 것이다. 누구에게는 복잡할 수도 단순할 수도 있다. ‘SNS를 멀리하는 게 좋은 걸 누가 몰라?’ 또는 ‘나에겐 유익하기만 한데..!’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을 거다. 그 답들이 틀렸다는 건 아니다. 그저 나의 정돈되지 않는 생각들 틈새로 끼어드는 나를 갉아먹는 생각들이 나의 선택지에 있어서 부정적인 영향력을 끼치고 있지 않은가 성찰해 봤을 뿐이다.
무더운 공기를 박차고 일어나 초록 세계로 뛰어들었다. 그곳에는 적정 시간에 홀연히 사라지고 마침내 잔잔한 웅성거림이 존재하는 작은 바닷가 마을, 내가 가장 애증 하는 곳.
들쑥날쑥한 늦은 아침은 늘 폭염경보로 시작된다. 나는 뭉그적거리며 초록 세계를 가만히 인지한다. 오래된 선풍기 바람이 힘없이 덜덜거리며 내 잠옷 바지 사이로 시원한 한숨을 불어넣는다. 물안개가 가득 머금은 푸른 새벽에 나가서 붉은 고추를 가득 싣고 들어오는 부부 사이에는 전날 만취로 부스스한 내가 서 있다.
월요일에서 일요일, 일주일, 그리고 7일간의 나의 여름 이야기.
나는 3권의 싸구려 로맨스 소설을 읽고 격주로 만취를 만끽하고 한정적인 물감을 가지고 그림을 그렸다. 선풍기 한 대가 움직이는 방문을 걸어 잠그고 즐겨듣는 노래를 크게 틀었다. 굳게 닫힌 문밖에는 잠시 무더위가 지나가기만을 기다리는 숙희가 마룻바닥에 누워있었다. 한 손에 휴대폰을 쥔 채 곯아떨어진 그녀의 모습은 귀엽기도 하고 어딘가 모르게 안쓰럽다. 큰 캔버스에 원색을 때려 넣고 소심한 낙서를 끄적였다. 한참을 내 그림을 못마땅하던 그녀는 이제 이해보다는 나에 대한 응원의 눈빛이 그득했다.
영제라는 꼬마 아이는 노란색을 좋아한다고 말했다. 어딘가 모르게 노란색을 닮은 아이에게는 귀여운 구석이 있었고 진지한 용기를 가진 아이였다.
“음, 제가 노란색이 좋은 이유는요. 어, 할머니 집에서 새끼 토끼를 받았는데요. 아 참! 토끼 이름은 양코구요. 별 뜻은 없어요. 동생이 그냥 그렇게 지었어요. 하루는 엄마가 청소기를 밀고 있었는데, 문을 열어뒀거든요.”
“토끼가 밖으로 나갔니?”
“모르겠어요. 그냥 죽은 채로 돌아와 있었어요. 집에 돌아왔을 때 갑자기 죽었어요.”
-그 토끼는 노란색이었어요. 그 뒤로 저는 노란색이 제일 좋아요
눈을 크게 뜨고 또박또박 말한 뒤에는 해맑은 미소. 왜 노란색이 좋냐고 물어봤을 때 나의 진부함이 드러났다. 정형화된 질문에 꼼꼼히 대답하는 아이. 나는 한 꺼풀 꺾이고 말았다. 앞니 두 개가 없는 입을 보이며 개구지게 웃는 영제를 보고 나는 입이 열 수가 없었다. 그들이 가진 순수함과 죽음을 의연하게 받아들이는 모습, 그 죽음에 대한 그의 태도에 그만 작아지는 것만 같았다. 햇살이 군데군데 들어오는 거실에는 그의 그림자가 나보다 더 길게만 느껴졌다.
작은 거인들이 돌아간 뒤에는 다음 날 암 수술을 앞둔 고모에게 연락이 오고 책상 위에는 한강 작가의 ‘소년이 온다’ 책이 아무렇게 널브러져 있었다.
감상적이다. 쉽게 기뻐하고 이내 나락으로 떨어지는 기분이다. 수시로 귓가가 시끄럽다. 까만 구석 틈새에서 무언가 튀어나올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그 알 수 없는 것에 잠식되어 서서히 녹아내리는 모습이 떠오른다. 가장 약한 눈가의 피부부터 발 끝이나 팔꿈치, 무릎, 손가락... 모두 흐물텅 녹아내리는 모습을 끝까지 지켜본 후에 눈알 마저 흘러내리기 시작한다. 녹아내린 것들은 언제 있었냐는 듯이 벽지 안 쪽으로 기체화 되어 깊게 스민다. 보이지 않는 세상은 까맣고 컴컴할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한 겨울 아무도 밟지 않은 눈밭처럼 새하얗다. 너무 하얘서 발자국 하나 내기도 조심스럽다. 문득 텅 빈 농구장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팅-. 팅-. 팅-... 힘을 잃은 농구공이 데굴데굴 구르며 코트를 가른다. 기준선이 생겼다. 선을 따라서 걸어본다. 선 밖은 낭떠러지라도 되는 마냥 숨을 꾹 참고 바람에 휘청이면서 조심스럽게 걸었다. 모두 스며서 실체는 없더라도 발 밑이 차가운 느낌을 상상해볼 수는 있다. 차가울 것이다. 차갑다. 꽁꽁 얼어서 칼바람에 에이는 귓바퀴처럼 찢어질듯 아프다가 통각마저 얼어버린다. 몸은 떨려오고 열을 발산한다. 미열로 눈이 녹았다가 주변의 찬 공기에 다시 얼어붙는다. 하드 바에 붙어버린 혓바닥같은 어정쩡한 모양새로 수 초가 지났을 쯤 이대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번뜩인다. 억지로 떼려다가는 살갗이 다 뜯어져버릴지도 모른다. 더운 물을 발등 위로 부어서 간단하게 빠져나왔다. 잠시 온기가 전해지는 듯 하다가 이내 아린 것처럼 다시 얼얼하게 뻐근해져 온다. 발가락 사이사이까지 새빨개졌다. 사고까지 얼얼해지는 기분이다.
눈이 찌푸려진다. 하늘을 올려다보니 어느새 구름이 걷히고 햇빛이 내리기 시작했다. 머리 위에서 지글지글 정수리가 타들어가듯 작열감이 느껴진다. 급급하게 손으로 데워지고 있는 머리를 가려본다. 주변을 둘러보니 개나리도 만개하였다. 날이 더워서 금세 져버릴 것 같지만 이왕 단장하고 나왔으니 예뻐해줘야겠다고 생각했다. 담장을 가득 메우며 늘어져있는 덩쿨과 얼기설기 얽혀있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시선을 어디에 두어야 할지 모호해진다. 갓 글자를 떼서 보이는 모든 간판을 읽고 다니는 어린 애 마냥 눈동자가 이리저리 옮겨진다. 하나 간판, 영이네 분식, 성인용품점, 인력 개발, 단체석 완비. 02-912-37... 아직 숫자 단위 세는 법은 몰라서 가격표는 읽지 못 한다. 우리나라는 화폐 단위가 크다. 10+3을 세기 위해서 양 손이 모자른 어린 아이에게는 그리 적합하지는 않아보인다. 그래도 나이가 들면 주변의 모든 것들이 숨쉬듯 자연스러워 진다. 하나하나 눈에 담지 않아도 대충 어떤 모양새인지 판별할 수 있다. 1,000원을 하나 둘 셋 세아리지 않아도 천 원인 것을 단번에 읽어낼 수 있다. 어른이 된다는 건 모든 것에 익숙해지는 과정일까? 어렸을 때는 모든 것이 신기했는데 이제는 별 것 아닌듯 지나치는 게 더 많아졌다. 개미 한 마리, 들꽃 한 송이, 소나무 한 그루, 모여있는 철쭉 무리들. 각자 제 위치에 적당히 자리 잡고 있을 것을 이미 알고 있으니까. 나는 어디에서 자리를 잡아야 할까? 그곳에선 안식할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