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umgik
leesidorson-blog · 7 yea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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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명 written by. 김 숨.
스티븐 스필버그의 명작 '라이언 일병 구하기'를 본 적 있는가? 제 2차 세계대전을 다룬 군인들의 이야기다. '라이언 일병'을 구하기 위해 목숨을 바쳐 고군분투한 감동 대작이다. 하지만 감독은 너무 미국의 영웅적인 면모만 다룰 것을 걱정한 나머지 첫 장면인 1944년 6월 6일 일어난 '노르망디 전투'에서 한 가지 이스터에그(영화 장면 속 제작자가 숨겨 놓은 메시지)를 넣었다. 노르망디 해변에서 격렬하게 싸우며 주인공을 비롯한 동료 병사들이 결국 노르망디 전투의 승기를 잡게 된다. 독일군의 참호 속에 수류탄을 넣어 확인 사살을 하고 굴에서 나온 병사들을 무참히 죽이게 되는데 참호에서 나온 외국 병사들이 주인공 동료들이 듣지 못하는 외국어로 살려달라고 간청하지만 그들은 가차없이 죽이게 된다. 그들은 포로로 잡힌 체코병사였으며 대사는 이렇다. 독일 포로군인: (체코어로) "쏘지 마세요! 나는 독일인이 아닙니다! 체코 사람이에요! 누굴 죽인 적도 없어요! 나는 체코인입니다!" (항복한 체코 병사를 그대로 사살함) 미군 1: "쟤가 지금 뭐라 한 거냐?" 미군 2: "밥 먹으려고 손 씻었대." 책을 들여다 보자. 이야기는 70년 전 만주 위안부 수용소의 비극을 기억하는 한 할머니의 이야기다. 배경은 현재. 할머니는 의정부 개발을 앞둔 15구역 양옥집에 살고 있다. 그녀에게 유일한 연고인 조카가 15구역 개발에 의한 이득을 위해 할머니를 홀로 살게 내버려뒀다. 할머니는 뉴스를 접하게 되는데 둘 뿐이었던 위안부 중 한 분이 별세했다는 소식이었다. 절대 잊을 수 없는 기억이지만, 그 뉴스를 시작으로 그녀의 참혹했던 기억은 일상 속에 투영된다. 그녀가 환시처럼 보이는 왼 쪽 손바닥의 다슬기들을 통해 13살 처음 만주로 끌려갔던 일들을 떠올리거나 그녀의 이웃인 수선집 아줌마와 그녀가 기르는 늙은 개를 통해 하루 몇 십명의 일본군인을 받았던 때를 떠올리기도 한다. 현재 아흔이 넘은 그녀는 위안부였지만 자신이 위안부였다는 사실을 밝히지 않았다. '위안부' 출신이었다는 걸 밝히고 난 후 주변 사람들이 자신을 떠났거나 비난을 받게 되었다는 걸 여타 다른 할머니들의 인터뷰를 보지 않아도 충분히 알고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할머니는 회상을 거듭 하게 되고 임종이 가까워진 마지막 위안부 할머니의 영상을 보고 난 후 그간 망설였던 결심을 하게된다. 책을 읽으면서 여타 다른 소설들을 보는 것과는 달랐다. '멈춰있거나 끝나버린 이야기' 가 아닌 '끝나지 않은, 현재 진행형의 이야기' 였기에 꽤 실감이 느껴졌다. 대한민국을 살아가면서 대한민국 근대사를 모르는 사람은 아마 없을 것이며 위안부 피해자 문제 또한 지금 뉴스로도 심심치 않게 나오고 있기 때문에, 그리고 이에 대한 대책이나 논의는 끝나지 않았고, 더 나아가 도움을 줄 수 있는 정부는 현재 그들을 위한 결정을 보류하거나 그들에게 이익을 추구하는 방식으로 무책임한 태도를 보이고 있기 때문에. 잊지 않았고 잊지 못할 그 기억을 생생하게 책으로 고스란히 담아 놓은 김 숨 작가의 선명한 문체의 수고로움에 경의를 표한다. 책을 읽으면서 꽤 흥미로운 부분이 많았다. 평소 책을 읽는 데 꽤 많은 시간을 할애한 나로써 그저 몇 시간을 투자하는 것 만으로 책을 다 읽었다는 사실이 놀라울 뿐이다. 이 책에서 볼 수 있는 흥미로운 점과 더불어 이 책에서 시사하는 바가 무엇인지 적어보고자 한다. 1. 실화를 기반으로 한, 소설 아닌 소설 (살아 숨 쉬는 이야기) 액자식 구성으로 되어있는 '한 명'은 재개발 구역에 쓸쓸히 살아있는 할머니가 일상 속에서 과거 만주 위안부로 끌려갔던 7년을 회상한다. 책을 읽는 독자들은 현재를 살고 있는 할머니의 모습에서 연민을 느끼고 과거 고통받았던 소녀들의 모습에서 큰 충격을 받는다. 주로 소설에서 갖는 '기, 승, 전, 결'이라는 구조를 따르는 것은 바깥 이야기일 뿐이며 액자 속 이야기에서 우린 기, 승, 결이 없는 참혹한 '전'을 경험하는 것이다. 우리는 한 가지 의심을 품기도 한다. '정말, 이런 비인간적인 일들이 일어났던 거야?' '소설이니만큼 너무 과장된 건 아니야?' 우리는 책의 겉 표지에서 '김 숨 장편'소설' 한 명' 이라는 간결한 문구를 보았을 것이다. 물론 이 책은 소설이 맞다. 하지만 이는 단지 이야기의 틀, 설정 등을 허구로 표현 되었을 뿐이고 작가는 정말 허구같은 비극의 참담함을 허투루 다루지 않기 위해 고증에 심혈을 기울이고 여러 인터뷰와 위안부 피해자 서적들에 대한 각주를 철저히 달아놓았다. - 소설을 다 읽고 난 후 수두룩한, 소설 속 각주의 출처들을 보라! – 생생히 살아있는 역사가, 그것도 인물 설정을 제외한 모든 게 다 사실이다. 희생자. 여러 이름을 작가는 한 데 모으고 녹여 인물들을 창조했는데, 주인공의 생명은 스스로의 삶을 살아가면서 겪는 일들을 우리들에게 보여준다. 서술을 하는 시점이 꽤 독특하고 인상깊었다고 생각했다. 주인공이 생각하거나 회상하는 장면등은 건 온전히 1인칭 주인공 시점이지만, 타자의 입장으로 돌려 관찰하는, 3인칭 관찰자 시점으로 변하기 때문이다. 마치 위안부였던 주인공을 늘 따라다니며 다큐멘터리를 찍은 것 처럼. 그리고 그 시선은 온전히 주인고의 몫으로 돌리는데, 그 시선(시점)엔 연민이, 또 온정이 배어있다. 이야기의 구조는 전에도 말했다시피 액자식 구조로 되어있는데, 액자 밖 이야기(현재, 주인공이 15단지에 살고있는 이야기)와 액자 속 이야기(과거, 주인공이 겪은 위안부 시절 이야기 ~ 위안부가 끝난 후 집으로 돌아간 이야기)로 구성되어있다. 책을 보며 흥미로웠던 점은 이러하다. 액자 밖 이야기는 시간 구성이 순서대로 흘러가는 반면, 안 이야기는 뒤죽박죽인 것이다. 물론 구성은 작가의 의도대로 마음껏 변형시킬 수 있다. 요즘 순서를 그대로 차용하는 이야기보다 더 인기를 끌 뿐더러 극적인 표현이 가능하니까. 하지만 작가가 표현하는 액자 속 이야기는 수많은 사건의 절정들을 배치시키는 데 있어 순서를 신경쓰지 않고 같은 사건을 반복 시켜 들려주기도 한다. 규칙이 모호한 것이다. 이 점은 독자로 하여금 혼란을 가져다 주기도 하지만 독자는 책을 생각하면서 읽기 때문에 결국 작가의 의도를 파악할 수 있으리라 본다. 내 관점으로 작가의 의도를 파악해 보면 '다큐멘터리적 구성'을 만들었다는 것이다. 책을 읽으면서 독자들은 정말 다큐멘터리를 생생히 보는 것처럼, 더 나아가 마치 편집되지 않은 한 할머니의 기억을 옆에서 생생하게 듣는 느낌을 받게 만드는 작가의 의도일지도 모른다. 작가의 표현력 또한 책의 생동감을 불어넣어준다. 작가가 비유하는 여러 표현들은 독자들의 몰입도를 높인다. 플롯을 탄탄하게 만드는 작가의 표현은 쉽게 다룰 수없는 비극을, 겪지 못한 다수들에게 충분히 느끼게 해준다. 이를테면 작중 수선집 아주머니의 개에게 자신을 투영해서 연민을 느낀다던지 그녀의 다가올 죽음을 암시하는 표현, 절친했던 동료의 죽음과 더불어 (주인공) 자신의 늪에 빠져 죽기 직전 겪은 환상 등을 비롯해 오감적인 비유와 자신의 과거와 현실을 반영하는 은유등을 보다 효과적으로 내비친다. 이야기로 다시 들어가 보자. 작가의 혼이 담긴 이 책에서 보여지는 의도는 무엇이었을까? 주인공(편의 상 '그녀'로 표기)은 아흔이 훌쩍 넘은, 15단지 양옥집에 사는 할머니다. 그녀는 일제시대 위안부로 징용되어 현재 사람들은 상상도 못할 고통을 받았다. 한 명 뿐인 위안부 희생자의 임종을 앞두고 그녀가 숨겨두었던 비밀을 밝힌다. 간단히 말했지만 이 표면적인 이야기만으로 의도를 설명하기엔 반쪽 밖에 되지 않는다고 본다. 중요한 건 '현실.' 즉 현재에도 그녀가 겪는 희생을 말해주고자 하는 것이다. 과거에만 당했던 희생에 그치지 않는, 멀지않은 과거에서 부터 현재, 앞으로의 미래까지 그녀가 겪은 2차적 피해에 대한 고발을 담는다. 1. 현재, 그녀를 비롯한 많은 위안부 피해자들의 고통. 오래 전 시대를 거슬러 올라 '화냥녀' 라는 표현을 돌아보자. 병자호란 이후 만주로 끌려간 조선 여인들이 돌아올 때 위로해주고 반기기는 커녕 정절을 잃었다는 이유로 천대하게 된다. - 작 중 그녀가 끌려간 곳 또한 만주인 점은 우연이 아니었을 것이다. – 이런 사건들은 조선시대에 국한되지 않고 그녀의 일생을 통 틀어 볼 때 나온 여러 인물들, 위안부 할머니의 다큐 속 증언, 귀향 후 그녀의 친척이 생각하는 위안부 - 몸 팔러 와서 돈 벌었다는 생각 – 를 문제삼고 있고 이런 2차적 피해를 이야기를 풀어가면서 무지했거나 편견으로 가득차 제대로 보지 못한 다수의 의식을 깨우치고 있다. 작가는 결국 이 책을 통해 위안부 피해자의 현실, 그 현실을 만든 다수에 대한 경고와 더불어 큰 관심과 도움을 통해 과거의 일을 똑바로 기억하고 속히 해결하기를 강력히 피력하는 것이다. 2. 한 명, 그 안에 담긴 수많은 목소리 (지금까지 주지 못한, 앞으론 줘야할 것들) 한 명. 단 한 명이다. 책은 시작부터 굉장히 충격적인 서두를 달린다. 왜냐하면 피해자 할머니들이 살아 계실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 문제에 대해 깊이 생각해야 한다. 위안부 피해자는 '오명'이 아니다. 그들에게 오명이라는 인식을 남기는 편견이 굉장히 잘못된 것이다. 이야기 속 그녀는 위안부였지만 위안부 신고를 하지 못했다. 시간이 거듭 흐르고 흘러 죽음이 임박했을 때 비로소 많은 것을 내려놓고 꺼지지 않는 최후의 '한 명'이 되고자 한다. 그녀의 용기는 숭고하고 뜻깊지만 그녀는 이야기의 마지막 – 어쩌면 처음일수도 있는 – 에서 다음과 같은 글을 남긴다. '차창 너머 세상에 눈길을 주면서 그녀는 새삼스레 깨닫는다. 여전히 무섭다는 걸. 열 세살의 자신이 아직도 만주 막사에 있다는 걸.' 두려움. 피해자를 피해자라 생각하지 않는 세상이 얼마나 두려운 지 우리는 깨달아야 한다. 서두에서 쓴 '라이언 일병 구하기' 의 비유를 다시 꺼내본다면 우리는 우리가 감싸야 할 희생자에게 도리어 총구를 겨누는 행위를 하는 것을 경계해야 한다. 진정한 승리자는 땅을 얼마나 차지하는 것이 중요한 게 아니다. 우리가 보호해야 할 모든 것을 지켜내고 아껴줘야 하는 것이다. 무분별한, 희생자들에 대한 편견. 무관심. 이런 것들이 그들에게 더 큰 고통을 안긴다는 것을 알도록 하자. 그리고 이 세상에 위안부 희생자 할머니들이 한 명 뿐이더라도, 아니 그 전에 이미 속히 해결되길 바란다. 지난 6일 위안부 피해자 박 숙이 할머니께서 별세했다. 등록된 위안부 피해자 238명 중 39명 밖에 남지 않은 것이다. ��사는 절대 잊힐레야 없지만 최근 국정은 현 정권을 위해 역사를 바꾸려 한다.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은 매주 투쟁을 벌인다. 이에 대한 대답은 그저 몇 푼 되는 위로금 뿐이다. 일본의 진심 어린 사과 한 번이면, 일찍 눈을 감은 분부터 살아계시는 분들까지 고통을 끝낼 수 있을텐데. 끝없는 고통이라도 한 시름 덜 수 있을텐데. 너무 안타깝고 심장 뛰며 살아가는 대한민국의 청년으로서도 많이 해드리지 못해서 죄송할 따름이다. 박 숙이 할머니를 비롯한 모든 위안부 희생자의 영혼의 명복을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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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esidorson-blog · 7 yea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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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명 written by. 김 숨
스티븐 스필버그의 명작 '라이언 일병 구하기'를 본 적 있는가? 제 2차 세계대전을 다룬 군인들의 이야기다. '라이언 일병'을 구하기 위해 목숨을 바쳐 고군분투한 감동 대작이다. 하지만 감독은 너무 미국의 영웅적인 면모만 다룰 것을 걱정한 나머지 첫 장면인 1944년 6월 6일 일어난 '노르망디 전투'에서 한 가지 이스터에그(영화 장면 속 제작자가 숨겨 놓은 메시지)를 넣었다. 노르망디 해변에서 격렬하게 싸우며 주인공을 비롯한 동료 병사들이 결국 노르망디 전투의 승기를 잡게 된다. 독일군의 참호 속에 수류탄을 넣어 확인 사살을 하고 굴에서 나온 병사들을 무참히 죽이게 되는데 참호에서 나온 외국 병사들이 주인공 동료들이 듣지 못하는 외국어로 살려달라고 간청하지만 그들은 가차없이 죽이게 된다. 그들은 포로로 잡힌 체코병사였으며 대사는 이렇다. 독일군: (체코어로) "쏘지 마세요! 나는 독일인이 아닙니다! 체코 사람이에요! 누굴 죽인 적도 없어요! 나는 체코인입니다!" (항복한 독일군 병사를 그대로 사살함) 미군 1: "쟤가 지금 뭐라 한 거냐?" 미군 2: "밥 먹으려고 손 씻었대." 책을 들여다 보자. 이야기는 70년 전 만주 위안부 수용소의 비극을 기억하는 한 할머니의 이야기다. 배경은 현재. 할머니는 의정부 개발을 앞둔 15구역 양옥집에 살고 있다. 그녀에게 유일한 연고인 조카가 15구역 개발에 의한 이득을 위해 할머니를 홀로 살게 내버려뒀다. 할머니는 뉴스를 접하게 되는데 둘 뿐이었던 위안부 중 한 분이 별세했다는 소식이었다. 절대 잊을 수 없는 기억이지만, 그 뉴스를 시작으로 그녀의 참혹했던 기억은 일상 속에 투영된다. 그녀가 환시처럼 보이는 왼 쪽 손바닥의 다슬기들을 통해 13살 처음 만주로 끌려갔던 일들을 떠올리거나 그녀의 이웃인 수선집 아줌마와 그녀가 기르는 늙은 개를 통해 하루 몇 십명의 일본군인을 받았던 때를 떠올리기도 한다. 현재 아흔이 넘은 그녀는 위안부였지만 자신이 위안부였다는 사실을 밝히지 않았다. '위안부' 출신이었다는 걸 밝히고 난 후 주변 사람들이 자신을 떠났거나 비난을 받게 되었다는 걸 여타 다른 할머니들의 인터뷰를 보지 않아도 충분히 알고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할머니는 회상을 거듭 하게 되고 임종이 가까워진 마지막 위안부 할머니의 영상을 보고 난 후 그간 망설였던 결심을 하게된다. 책을 읽으면서 여타 다른 소설들을 보는 것과는 달랐다. '멈춰있거나 끝나버린 이야기' 가 아닌 '끝나지 않은, 현재 진행형의 이야기' 였기에 꽤 실감이 느껴졌다. 대한민국을 살아가면서 대한민국 근대사를 모르는 사람은 아마 없을 것이며 위안부 피해자 문제 또한 지금 뉴스로도 심심치 않게 나오고 있기 때문에, 그리고 이에 대한 대책이나 논의는 끝나지 않았고, 더 나아가 도움을 줄 수 있는 정부는 현재 그들을 위한 결정을 보류하거나 그들에게 이익을 추구하는 방식으로 무책임한 태도를 보이고 있기 때문에. 잊지 않았고 잊지 못할 그 기억을 생생하게 책으로 고스란히 담아 놓은 김 숨 작가의 선명한 문체의 수고로움에 경의를 표한다. 책을 읽으면서 꽤 흥미로운 부분이 많았다. 평소 책을 읽는 데 꽤 많은 시간을 할애한 나로써 그저 몇 시간을 투자하는 것 만으로 책을 다 읽었다는 사실이 놀라울 뿐이다. 이 책에서 볼 수 있는 흥미로운 점과 더불어 이 책에서 시사하는 바가 무엇인지 적어보고자 한다. 1. 실화를 기반으로 한, 소설 아닌 소설 (살아 숨 쉬는 이야기) 액자식 구성으로 되어있는 '한 명'은 재개발 구역에 쓸쓸히 살아있는 할머니가 일상 속에서 과거 만주 위안부로 끌려갔던 7년을 회상한다. 책을 읽는 독자들은 현재를 살고 있는 할머니의 모습에서 연민을 느끼고 과거 고통받았던 소녀들의 모습에서 큰 충격을 받는다. 주로 소설에서 갖는 '기, 승, 전, 결'이라는 구조를 따르는 것은 바깥 이야기일 뿐이며 액자 속 이야기에서 우린 기, 승, 결이 없는 참혹한 '전'을 경험하는 것이다. 우리는 한 가지 의심을 품기도 한다. '정말, 이런 비인간적인 일들이 일어났던 거야?' '소설이니만큼 너무 과장된 건 아니야?' 우리는 책의 겉 표지에서 '김 숨 장편'소설' 한 명' 이라는 간결한 문구를 보았을 것이다. 물론 이 책은 소설이 맞다. 하지만 이는 단지 이야기의 틀, 설정 등을 허구로 표현 되었을 뿐이고 작가는 정말 허구같은 비극의 참담함을 허투루 다루지 않기 위해 고증에 심혈을 기울이고 여러 인터뷰와 위안부 피해자 서적들에 대한 각주를 철저히 달아놓았다. - 소설을 다 읽고 난 후 수두룩한, 소설 속 각주의 출처들을 보라! – 생생히 살아있는 역사가, 그것도 인물 설정을 제외한 모든 게 다 사실이다. 희생자. 여러 이름을 작가는 한 데 모으고 녹여 인물들을 창조했는데, 주인공의 생명은 스스로의 삶을 살아가면서 겪는 일들을 우리들에게 보여준다. 서술을 하는 시점이 꽤 독특하고 인상깊었다고 생각했다. 주인공이 생각하거나 회상하는 장면등은 건 온전히 1인칭 주인공 시점이지만, 타자의 입장으로 돌려 관찰하는, 3인칭 관찰자 시점으로 변하기 때문이다. 마치 위안부였던 주인공을 늘 따라다니며 다큐멘터리를 찍은 것 처럼. 그리고 그 시선은 온전히 주인고의 몫으로 돌리는데, 그 시선(시점)엔 연민이, 또 온정이 배어있다. 이야기의 구조는 전에도 말했다시피 액자식 구조로 되어있는데, 액자 밖 이야기(현재, 주인공이 15단지에 살고있는 이야기)와 액자 속 이야기(과거, 주인공이 겪은 위안부 시절 이야기 ~ 위안부가 끝난 후 집으로 돌아간 이야기)로 구성되어있다. 책을 보며 흥미로웠던 점은 이러하다. 액자 밖 이야기는 시간 구성이 순서대로 흘러가는 반면, 안 이야기는 뒤죽박죽인 것이다. 물론 구성은 작가의 의도대로 마음껏 변형시킬 수 있다. 요즘 순서를 그대로 차용하는 이야기보다 더 인기를 끌 뿐더러 극적인 표현이 가능하니까. 하지만 작가가 표현하는 액자 속 이야기는 수많은 사건의 절정들을 배치시키는 데 있어 순서를 신경쓰지 않고 같은 사건을 반복 시켜 들려주기도 한다. 규칙이 모호한 것이다. 이 점은 독자로 하여금 혼란을 가져다 주기도 하지만 독자는 책을 생각하면서 읽기 때문에 결국 작가의 의도를 파악할 수 있으리라 본다. 내 관점으로 작가의 의도를 파악해 보면 '다큐멘터리적 구성'을 만들었다는 것이다. 책을 읽으면서 독자들은 정말 다큐멘터리를 생생히 보는 것처럼, 더 나아가 마치 편집되지 않은 한 할머니의 기억을 옆에서 생생하게 듣는 느낌을 받게 만드는 작가의 의도일지도 모른다. 작가의 표현력 또한 책의 생동감을 불어넣어준다. 작가가 비유하는 여러 표현들은 독자들의 몰입도를 높인다. 플롯을 탄탄하게 만드는 작가의 표현은 쉽게 다룰 수없는 비극을, 겪지 못한 다수들에게 충분히 느끼게 해준다. 이를테면 작중 수선집 아주머니의 개에게 자신을 투영해서 연민을 느낀다던지 그녀의 다가올 죽음을 암시하는 표현, 절친했던 동료의 죽음과 더불어 (주인공) 자신의 늪에 빠져 죽기 직전 겪은 환상 등을 비롯해 오감적인 비유와 자신의 과거와 현실을 반영하는 은유등을 보다 효과적으로 내비친다. 이야기로 다시 들어가 보자. 작가의 혼이 담긴 이 책에서 보여지는 의도는 무엇이었을까? 주인공(편의 상 '그녀'로 표기)은 아흔이 훌쩍 넘은, 15단지 양옥집에 사는 할머니다. 그녀는 일제시대 위안부로 징용되어 현재 사람들은 상상도 못할 고통을 받았다. 한 명 뿐인 위안부 희생자의 임종을 앞두고 그녀가 숨겨두었던 비밀을 밝힌다. 간단히 말했지만 이 표면적인 이야기만으로 의도를 설명하기엔 반쪽 밖에 되지 않는다고 본다. 중요한 건 '현실.' 즉 현재에도 그녀가 겪는 희생을 말해주고자 하는 것이다. 과거에만 당했던 희생에 그치지 않는, 멀지않은 과거에서 부터 현재, 앞으로의 미래까지 그녀가 겪은 2차적 피해에 대한 고발을 담는다. 1. 현재, 그녀를 비롯한 많은 위안부 피해자들의 고통. 오래 전 시대를 거슬러 올라 '화냥녀' 라는 표현을 돌아보자. 병자호란 이후 만주로 끌려간 조선 여인들이 돌아올 때 위로해주고 반기기는 커녕 정절을 잃었다는 이유로 천대하게 된다. - 작 중 그녀가 끌려간 곳 또한 만주인 점은 우연이 아니었을 것이다. – 이런 사건들은 조선시대에 국한되지 않고 그녀의 일생을 통 틀어 볼 때 나온 여러 인물들, 위안부 할머니의 다큐 속 증언, 귀향 후 그녀의 친척이 생각하는 위안부 - 몸 팔러 와서 돈 벌었다는 생각 – 를 문제삼고 있고 이런 2차적 피해를 이야기를 풀어가면서 무지했거나 편견으로 가득차 제대로 보지 못한 다수의 의식을 깨우치고 있다. 작가는 결국 이 책을 통해 위안부 피해자의 현실, 그 현실을 만든 다수에 대한 경고와 더불어 큰 관심과 도움을 통해 과거의 일을 똑바로 기억하고 속히 해결하기를 강력히 피력하는 것이다. 2. 한 명, 그 안에 담긴 수많은 목소리 (지금까지 주지 못한, 앞으론 줘야할 것들) 한 명. 단 한 명이다. 책은 시작부터 굉장히 충격적인 서두를 달린다. 왜냐하면 피해자 할머니들이 살아 계실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 문제에 대해 깊이 생각해야 한다. 위안부 피해자는 '오명'이 아니다. 그들에게 오명이라는 인식을 남기는 편견이 굉장히 잘못된 것이다. 이야기 속 그녀는 위안부였지만 위안부 신고를 하지 못했다. 시간이 거듭 흐르고 흘러 죽음이 임박했을 때 비로소 많은 것을 내려놓고 꺼지지 않는 최후의 '한 명'이 되고자 한다. 그녀의 용기는 숭고하고 뜻깊지만 그녀는 이야기의 마지막 – 어쩌면 처음일수도 있는 – 에서 다음과 같은 글을 남긴다. '차창 너머 세상에 눈길을 주면서 그녀는 새삼스레 깨닫는다. 여전히 무섭다는 걸. 열 세살의 자신이 아직도 만주 막사에 있다는 걸.' 두려움. 피해자를 피해자라 생각하지 않는 세상이 얼마나 두려운 지 우리는 깨달아야 한다. 서두에서 쓴 '라이언 일병 구하기' 의 비유를 다시 꺼내본다면 우리는 우리가 감싸야 할 희생자에게 도리어 총구를 겨누는 행위를 하는 것을 경계해야 한다. 진정한 승리자는 땅을 얼마나 차지하는 것이 중요한 게 아니다. 우리가 보호해야 할 모든 것을 지켜내고 아껴줘야 하는 것이다. 무분별한, 희생자들에 대한 편견. 무관심. 이런 것들이 그들에게 더 큰 고통을 안긴다는 것을 알도록 하자. 그리고 이 세상에 위안부 희생자 할머니들이 한 명 뿐이더라도, 아니 그 전에 이미 속히 해결되길 바란다. 지난 6일 위안부 피해자 박 숙이 할머니께서 별세했다. 등록된 위안부 피해자 238명 중 39명 밖에 남지 않은 것이다. 역사는 절대 잊힐레야 없지만 최근 국정은 현 정권을 위해 역사를 바꾸려 한다.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은 매주 투쟁을 벌인다. 이에 대한 대답은 그저 몇 푼 되는 위로금 뿐이다. 일본의 진심 어린 사과 한 번이면, 일찍 눈을 감은 분부터 살아계시는 분들까지 고통을 끝낼 수 있을텐데. 끝없는 고통이라도 한 시름 덜 수 있을텐데. 너무 안타깝고 심장 뛰며 살아가는 대한민국의 청년으로서도 많이 해드리지 못해서 죄송할 따름이다. 박 숙이 할머니를 비롯한 ���든 위안부 희생자의 영혼의 명복을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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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esidorson-blog · 7 yea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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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자와 해학의 노스탤지어 (The Triplets of Belleville, 2003)
렘브란트의 걸작 중 하나인 ‘돌아온 탕자'를 아는가? 성경의 내용을 빗대어 표현한 빛의 마법사 렘브란트의 작품 '돌아온 탕자'의 내용은 이러하다. 제목 그대로 평범하기 짝이 없는 소작농 가족 중 막내아들이 자신의 삶에 회의를 느끼고 집에 있는 재산을 가지고 가출한다. 방탕한 삶 속에 돈을 다 탕진하고는 빈털털이인 채 집으로 돌아온다. 아버지는 아들을 꾸짖지 않고 되려 가축을 잡고 큰 잔치를 벌이며 그를 용서하는 내용을 그림 한 폭에 담은 이 작품은 나로 하여금 반색을 드러내게 만들었다. '집안 재산을 다 탕진해버린 아들을 하염없이 넓은 자비심으로 용서해주고 더 나아가 잔치까지 벌이다니……..’ 나 또한 누구든지 인정할 수 있는 효자라고 말할 수 없겠지만 내가 부모였다면 용서하긴 커녕 그가 잘못을 반성하길, 그 반성의 태도가 보여질 수 있길 바랄텐데 말이다. 벨빌의 세 쌍둥이는 탕자를 찾는 어머니의 이야기다. 극을 자세히 본다면 탕자라고 말 할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난 탕자일 것이라 생각이 든다. 어머니의 헌신이 만들어낸 환상과 같은 스토리를 간략히 소개하자면 이렇다. 극은 벨빌의 세 쌍둥이가 등장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서커스 단원인 세 쌍둥이는 서커스 단원들이 하나 둘 씩 묘기를 부릴 때마다 뒤에서 코러스를 넣는다. 관객들의 흥을 돋우기 위해서다. 하지만 즐겁게 보일 무대는 크고 작은 사건들이 연속되고 결국 방송 중단으로 이어진다. 이 장면을 tv로 보는 모자 (정확히 말하자면 할머니와 손주. 편의 상 어머니와 아들로 표기) 가 보인다. 방송중단을 영어로 표기되어 있어 글을 보지 못하는 어머니는 아들에게 묻는다. “영화 끝났니?” 아들은 아무 말 하지 못한다. 눈 밑이 검게 그을린 아들은 늘 의기소침하다. 어머니는 아들이 원하는 것이 무엇이든 들어주고 싶어한다. 방송중단 뒤 이어진 피아노 연주에 약간이나마 관심을 보이는 아들을 위해 피아노를 연주하는 어머니. 형편없는 솜씨에 아들은 등을 돌린다. 친구가 필요할 것 같은 아들을 위해 '브루노’ 라는 강아지를 데려오지만 아들은 초반에만 흥미를 보일 뿐 어두운 낯빛은 여전하다. 어머니는 아들의 방을 정리하다 우연히 스크랩 노트를 보게 되었다. 그리고 아들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게 된다. 어머니는 아들에게 자전거를 선물해주었고 아들은 처음으로 가장 행복한 표정을 지으며 하루종일 자전거만 탄다. 시간이 좀 흘러 브루노는 자신의 몸을 지탱하기 힘든 갸날픈 다리로 매 15분 마다 자신의 집을 지나가는 철도를 보며 왕왕 짖는다. – 브루노의 유년시절 자신의 꼬리를 다치게 한 장난감 열차에 대한 반응의 확장이라 생각한다. – 철길이 집을 아슬아슬하게 지나가기에, 집은 거의 쓰러져 가지만 가족은 여전하다. 브루노는 아들과 어머니를 기다린다. 아들은 자전거로 마르세유 거리를 열심히 내달리고 어머니는 아들의 자전거 뒤에 연결된 자전거를 타며 호각을 삑삑 불며 호되게 훈련을 시킨다. 집에 돌아온 둘. 아들은 녹초가 되어 거의 움직일 수 없을 때 어머니는 다리 마사지를 해주고 아들의 계체량을 맞추려 식사량도 조절해준다. 아들이 식사를 할 동안 어머니는 자전거 바퀴의 조율을 맞춘다. 강아지 브루노는 음식을 좀 밝히긴 하지만 여전히 가족들에게 애교를 부린다. 그날 밤 브루노는 열차를 타고 브루노가 있을 자리에 승객들이 왕왕 짖는 꿈을 꾼다. 마르세유 자전거 경주. 어머니는 트럭 위에서 아들을 유심히 보며 응원을 해준다. 하지만 아들은 이미 1등하기에 글렀다. 제 나름 노력했지만 결국 지쳐 쓰러진 아들에게 한 트럭이 선다. 트럭에 내린 양복차림에 수상한 사내 둘. 그들은 아들처럼 지쳐 쓰러진 두 선수를 태우고 있었고 아들 또한 그 트럭에 올라탄다. 갑작스런 아들의 실종에 어머니는 브루노와 함께 아들을 찾았지만 아들은 프랑스를 떠나는 배를 타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납치된 것이다. 어머니는 브루노를 데리고 20분 탈 수 있는 소형 배를 타고 아들을 찾는 여정이 시작된다. '벨빌의 세 쌍둥이(이하 '벨빌’)'은 다양한 각도에서 재 조명해 볼 수작이었다. 필자는 '벨빌'을 작품의 단편적 이야기가 아닌, 캐릭터와 미학적 측면을 통해 살펴보고자 한다. 1. '모정'에서 그치지 않는, 성장 영화 어머니는 아들을 구하기 위해 험난한 여정도 마다 않는다. 자전거를 타며 이상을 꿈꾸는 아들을 위해, 납치되어 망망대해를 떠 다니는 아들을 찾기 위해 불편한 다리에 온전한 다리의 종아리만한 높이의 굽을 신으며 고군분투한다. 하지만 이런 모습에서 보이는 헌신은 그저 무덤한 그녀의 표정에서 무색해지는 듯 하다. 아들을 위해 해주는 많은 일들이 그녀에겐 어쩌면 당연한 것처럼. 그녀는 위험 천만한 일들을 다 해낸다. 하지만 그녀의 삶에 재조명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그녀에게 본격적으로 초점을 맞추게 되는 장면은 빈털털이가 되어 벨빌을 떠돌다 연주를 시작했을 때부터일 것이다. 문명을 대표하는 큰 다리 밑에 스산하고 볼품없는 버드나무 가지를 태우며 찬 몸을 녹일 수밖에 없을 때, 어머니는 늘 아들을 위해 조율했던 바퀴를 꺼내어 연주를 시작한다. 앞서 말했듯이 종종 피아노로 연주를 하는 그녀의 모습을 봤지만 그다지 훌륭한 솜씨는 아니었다. 하지만 그녀는 바퀴 살을 조율했을 때부터 이미 암묵적으로 그녀의 꿈을 표출하고 있었다. 그 실력은 당대 최고 뮤지션이었던 벨빌의 세 쌍둥이의 마음을 흔들었고, 이들은 사건을 해결하는 데 가장 든든한 버팀목이 되었다. 그녀의 솜씨는 그녀의 통큰 굽 처럼 아들을 위해 귀결되었다는 점 또한 주목된다. 결국 아들바라기인 그녀는 자신의 꿈과 더불어 자신의 장애 또한 아들을 구하는 데 쓴다. 자신의 숨겨둔 꿈을 찾은 것을 자아 발견이라고 한다면 이를 통해 진정한 헌신을 하는 것은 자아 실현이 아닐까? 2. 자본주의에 대한 풍자, 하지만 예술영화라기에 부끄러워하는 겸손함 영화를 보면서 큰 틀은 아마 '모성애'였을지 몰라도 그 속에 들어가있는 이스터에그를 통해 영화의 재미를 한 층 더 느낄 수 있던 것 같다. 영화에서 담긴 풍자를 들여다 보자. 영화에서 나오는 인물들은 대개 체격을 통해 구분될 수 있었다. 기득권 층, 자본을 많이 가지고 있으며 그 자본을 통해 향락을 즐길 수 있는 이들은 체격이 두껍고 살집이 많다. 그리고 그들을 위해 서비스를 제공해 주는 사람들을 보면 보통 체격이 마르거나 그 직업에서 느낄 수 있는 체격이 많다. 자본주의 시대 속에서 자신의 자본을 투자해 서비스를 받는 사람이라는 건 의미 자체로 문제가 되지 않는다. 이들을 만들어 준 사람들이나 이들을 통해 만들어진 사람 간의 상호를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겠다. 가장 인상깊게 봣던 고급 식당의 웨이터를 살펴보자. 그의 마른체격은 크게 문제가 되지 않지만 인체 선이 굉장히 비정상적이다. 늘 기득권층의 눈치를 살피는 그는 허리가 뒤로 꺾인 것도 모자라 얼굴 마져도 굉장히 휘어있어 손님을 바라볼 때면 앵글이 180도로 돌아가 있다. 이는 굉장히 자신의 일에 충실할 것도 모자라 그들의 불만이 닥칠 때마다 심한 우려를 표출할 것을 반영한다. – 실제로 중간에 강아지 브루노가 손님에게 저지르는 실수 때문에 대성통곡을 한다. – 이에 반해 소시민의 삶을 살아가는 주인공을 보면 굉장히 볼품없는 모습이 많다. 바이크 선수인 아들은 다리는 우람하기 짝이 없지만 그 외에 상체를 보면 더는 삶을 영위할 수 없는 것처럼 건장하지 못하다. 살집이 있는 강아지 브루노는 몸을 지탱해주는 다리가 얇아 걷는 것보다 구르는 게 더 편하고 주인공인 어머니는 한 쪽 다리가 비정상적으로 짧다. 기득권 층을 제외하고는 사회적인 약자, 장애인, 노인, 서비스 종사자를 묘사를 하는 데 있어 기득권 만큼 꽤 과한 면이 많다. 그렇게 때문에 감독의 정확한 의도라고 본다면 사실상 자본주의를 넘어선, 상업 영화와 예술 영화 간의 힘 겨루기를 은유적으로 비판하는 것이 된다. 지금 영화 산업의 주를 이루고 있는 곳은 대개 할리우드다. 굉장히 유래가 깊은 이 곳에 탄생한 여러 작품들을 토대로 영화 산업은 발전하고 있고 할리우드 영화를 보며 자라난 세대들이 영상문화를 창조하기도 한다. 근데 과연 대중적으로 인정을 받았다고 꼭 좋은 영화일까? 라고 물어본다면 확답을 주기 어렵다. 분명 상업영화에서 오는 병폐 또한 있기 때문이다. 상업영화의 잇다른 성공에 지나치게 맹신하는 자본가들이 벌이는 횡포, 이로 인해 댜양성, 특별한 개성을 가지고 있는 수많은 예술가들이 완성한 영화를 틀어보지도 못하고 웹 상에 떠돌기 부지기수다. 영화에서 보여지는 대표적인 메타포는 시대를 풍미한 세 쌍둥이의 집을 들어갔을 때 - 사창가 – 굉장히 더러운 풍경들을 보여주는 데 파리가 꼬인 변기 속 오물이 미키마우스 캐릭터를 연상시키거나 암거래장 자본가를 도와주는 기술자 또한 디즈니를 연상시키는 것이 그렇다고 할 수 있다. 예술영화라고 꼭 좋은 것만은 아니라는 걸 영화에서 시사하는 데 – 주관적인 입장으로 봤을 때 – 영화 속 나오는 세 쌍둥이를 보면 그렇다고 할 수 있다. 그들은 예술에 일생을 바쳤고 노인이 된 지금도 예술로 밥 벌어 먹는 사람들이다. 비록 캬바레에서 시작되었다 하지만 그들이 젊은 시절 불렀던 서커스 테마 곡은 기득권 층 누구라도 모르는 사람 없이 흥얼거린다. 하지만 그들이 겪는 바를 보면 입장이 중의될 수 있을 것 같다. 세 자매는 어머니와 음악적인 교감 후 그녀 – 와 브루노 – 를 보살펴 주기로 결심한다. 하지만 생활은 굉장히 참담했다. 개구리를 폭탄으로 잡아 먹고 그들의 삶에 필요한 가전도구는 악기라는 이유로 쓰질 않는다. 폐품(이나 다를 것 없는)으로 연주를 하고 페이를 받고 사는 삶이 뭔가 사람다움이 느껴진다기 보다 마녀들이 살아가는 것과 같았다. 예술에 대한 큰 자부심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이 과연 정답일까 라는 질문에 쉽게 답할 수 없는 작품이었다. – 세 쌍둥이의 히트곡이 사건 해결에 방해가 되는 이들의 집중을 분산시키는 데 도움이 되긴 했지만 이에 비해 그들이 하는 예술이 한없이 초라해 보이게 하는 건 안타까웠다. – 글을 마치면서 난 처음 했던 렘브란트의 '돌아온 탕자'를 다시 꺼내 본다. 탕자는 집으로 돌아갔지만 영화에선 어머니가 아들(탕자)을 데리고 돌아온다. 무지몽매해진 아들의 능력을 이용했던 것도 분명 문제가 있겠지만 어머니는 늘 아들을 뒷받침해준다. 어머니에게 아들은 삶이 되었기에 어떤 위험이 닥치더라도 아들을 구한 것이다. 아들은 이에 대해 감사함을 보였을까? 그건 말하기 곤란하다. 혹독한 훈련이 끝난 경기에서도 그의 역량은 어머니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했고 애초에 납치일 것을 모르고 트럭에 탄 건 아니었을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 이 점에서 명화가 떠올랐던 것 같다. - 이처럼 일방적인 사랑의 결과는 비극을 초래한다. 하지만 그림 속 아버지나 영화 속 어머니가 간절히 바랬던 건 그만큼의 보답식 사랑이 아니었다. 일상 속에서 늘 당연히 할 수 있는 것들. 그 뿐인 것이기에 마지막 대사를 난 잊을 수 없을 것 같다. 어머니 : 영화 끝났니? 아들 : 네. 끝났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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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esidorson-blog · 8 yea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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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독이 숙명이었던 사람의 이야기’ (days of being wild, 1990)
영화를 볼 때, 제가 치중하는 것은 주로 ‘스토리’, ‘연기’, ‘연출’ 등입니다. 그 중 ‘연기’로 보자면 저는 ‘주연’에 몰입이 된다 하더라도 결국 남는 건 ‘조연’일 것이라 자부합니다. 그 연유는 ‘조연’을 설정한 감독의 의중을 파악한 것도 있겠지마는, 1급보다 2,3급에 대한 애정이 더 큰 것일 수도 있겠지요. 따라서 반가운 배우들이, ‘조연’에서 그들의 연기를 실감하는 쾌감도 큰 더러 알지 못했던 배우가 몇 분 안 되는 ‘조연’에서 보여준 폭발적인 연기를 보고 감탄할 때도 있습니다. 긴 러닝 타임 동안 주연이 연기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죠. 그렇다고 주연을 깎아내리거나 그들의 소양이 부족하다는 건 전혀 아닙니다. 감독은 주연 배우를 설정하는 데 있어 그들의 책임이 있고, 또 영화를 이끌어가는 것에 있어 그들을 신뢰한다는 증거이니까요. 하지만 예상치 못했던 조연의 활약에 눈길이 더 가는 것은 사실입니다. 훌륭한 주연과 그들을 어시스트하는 조연. 그들의 연기 합과 더불어 감독의 연출, 각본이 합쳐진다면 정말 손색이 없을 정도의 영화가 탄생하는 겁니다. - 물론 ‘연기’의 질이 높은 것을 크게 감탄할 때도 있지만, 감독의 의도, 즉 영화의 흐름을 바꿔버릴 연기를 하는 것은 어쩌면 연출가의 입장에서 ‘실’ 일수도 있을 거라 생각합니다. 때에 따라 다르지요. - 하지만 저는 왕가위 감독의 ‘아비정전’을 보게 되면서 ‘주연’의 힘과 ‘조연’의 존재감 있는 맞물림을 경험했습니다. 아무리 ‘조연’에 관심이 있고 애정이 크더라도 ‘주연’의 힘을 무시할 수 없는 영화지요. 영화 ‘아비정전(1990)’은 왕가위의 두 번째 연출작임과 동시에 왕가위 감독과 장국영 배우 조합의 시발점입니다. 일설로는 유덕화를 조연으로, 장국영을 특별 출연으로 넣고자 했으나 장국영에 대한 왕가위 감독의 애정이 너무 커서 ‘주연’을 위한 영화라 부를 정도로 많은 수정을 한 작품이지요. 창작을 하는 이들이 ‘뮤즈’를 만난다면, 그로 인해 자신의 영감과 열정이 더욱 샘솟는다면 그 얼마나 행복한 일이겠습니까. 고로 ‘아비정전’은 왕가위 감독에게 있어 장국영을 통한, 장국영을 위한 영화라고 보여 집니다. 영화는 이렇습니다. 태어날 때부터 양모 밑에 자라난 ‘아비(장국영 役)’는 소위 말하자면 ‘건달’이나 다를 바 없습니다. 그는 친 부모가 자신을 버렸다는 것에 대한 좌절감, 분노, 양 모의 그릇된 애정 등에 의한 트라우마가 있습니다. 이는 자신이 성인이 됨에도 불구하고 정착하지 못하고 타인에게 상처만 주는 ‘이기적인 남자’로서의 변모를 꾀하게 되지요. 그는 자신을 떠나려는 양 모를 애증하면서도 친부모의 존재를 확인하려 합니다. 그리고 드디어 친부모가 사는 곳을 알게 되었을 때, 필리핀(친부모의 소재)으로 향하게 되지요. 방금 들려드린 얘기로 ‘아비정전’을 다 설명할 수는 없습니다. 그 사이 많은 일들이 일어나거든요. 수리진(장만옥 役), 미미(유가령 役)와의 연애, 수리진과 경관(유덕화 役)의 만남, 미미를 짝사랑하는 아비의 친구(장학우 役)........ 다양한 이야기가 얽혀있습니다. 왕가위 감독의 개성강한 레퍼토리이지만 전 ‘아비’에 집중해서 리뷰를 하고자 합니다. ‘장국영’을 마음에 깊이 둔 ‘왕가위’처럼 말이지요. 아비를 잘 아는 친구나 양 어머니가 아닌 이상, 아비를 이해할 수 없을 겁니다. 아니, 그의 가까운 이들도 아비를 완전히 알지 못할 겁니다. 그는 자유분방하고 사고뭉치에다가 꽤 감정적인 사람이니까요. 하지만 그의 천성적 내력을 알게 된다면, 아마 그를 이해할지 모릅니다. 동조할 수 없겠지만. 그는 이미 단정지은 상태입니다. 자신의 삶, 관계 등에 대해 모든 것을 끝내 놓은 상태입니다. 생에 미련이 없던 것은 그만큼 그가 기댈 곳이 없었던 겁니다. 그래서 자유로운 것이죠. 안주하고 싶지 않고 떠나고픈. 그러던 그가 눈을 감으면서 삶에 대한 미련이 조금이라도 남습니다. “새가 한 마리 있었다..... 죽을 때까지 날아다니던. 하지만 새는 어느 곳에도 가지 못했다. 왜냐하면 처음부터 새는 죽어있었기 때문이다. 난 전에 그랬지, 내가 사랑한 여인이 누군지 평생 모를 거라고. 지금 그녀가 그립군. 아....... 동이 트는군. 오늘 날씨는 좋을 거 같은데 저녁 노을은 어때?” 담담히 받아들이면서 조금이나마 후회하는. 저는 그 장면을 볼 때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비는 구멍이 난 주머니처럼 사랑을 늘 채울 수 없는, 그런 처연한 ’고독‘을 타고난 것 같다.’ 라고요. 여인들에게 먼저 다가서면서 결국 먼저 내치는 아비의 모습. 사랑을 주는 만큼 받지만 어린 시절 트라우마에 깊게 잠겨 그 사랑이 끝난다는 것을 견디기 힘들어하는 것 같습니다. 저는 연기나, 연출이나, 아니면 여러 방면에서 누군가가 활동을 하고 있을 때 그들의 역할이 얼마나 잘 맞아 떨어지는 지를 주로 ‘옷’에 비유하곤 합니다. 그곳에서 ‘연기’를 들자면 영화라는 옷을 배우가 얼마나 소화할 수 있느냐가 관건이지요. 배우가 입기엔 헐렁할 수 있는 것도 있고, 억지로 입은 듯한 꽉낀 옷일 수도 있습니다. 장국영은 ‘아비’에서 제가 보기에는 맞춤정장을 입은 듯합니다. - 더 소름이 돋는 사실은, 그가 출연한 대부분의 영화가 그의 맞춤정장이었다는 사실입니다 - 모두들 장국영을 대체 불가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만, 그렇다고 그가 살벌할 정도로 연기를 펼치는 배우라기엔 조금 더 두고 봐야 했을 겁니다. - 그래서 그의 죽음이 안타깝지요. - 하지만 그의 외모와 더불어 연기를 향한 집념과 배역을 향한 그의 진심어린 마음이 일구어낸 다양한 캐릭터들, 그 캐릭터를 끌어안은 장국영이기에 우리는 그를 기억하고 그리워하고 있을지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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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esidorson-blog · 8 yea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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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독히 습하고 한기(恨氣)서린 방에 타 들어가는 성냥불 같은 영화’ (hunger, 2008)
우연히 기회가 되어 이전에 봤던 스티브 맥퀸 감독의 ‘헝거(2008)’를 다시 봤습니다. 처음 볼 당시 느꼈던 인상이 드문드문 기억에 남았었는데, 다 알고 있어도 충격과 긴장감은 여전하더군요. 헝거를 간략하게 소개드리자면 영국령이 된 아일랜드의 독립운동단체 ‘IRA’를 ‘정치범’으로 인정하지 않고 ‘테러범’으로 규정한 마가렛 대처 수상의 정책 하에, 이를 바로잡으려는 IRA의 수장 ‘보비 샌즈’가 교도소 내의 IRA 단원들과 함께 불결운동, 모포로만 옷을 감싸는 모포운동 –정확한 표현은 아니지만-, 단식 투쟁 등으로 권리 회복 뿐 아닌 독립을 위해 투쟁하는 모습을 다룬 이야기입니다. - 표현상의 문제를 조금 수정하자면, 영국의 입장에서 아일랜드 시위대를 범죄자로 규정하고 가둘 때, 그들의 죄목을 ‘정치 범죄’ 가 아닌 ‘테러’로 규정한다는 거죠. - 영화를 보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주된 공간이 ‘교도소’ 인데, 그 한정된 공간 안에서 그들의 투쟁이 실감나게 표현되어있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입니다. 꽤 충격적인 장면들이 많이 있었죠. ‘보비 샌즈’가 주인공인 만큼 그들에 대한 연민도 느낀 점도 있으실 거 에요. 그만큼 헝거에서 표현된 아일랜드 –뿐 아닌 스코틀랜드 – 의 시대적 배경이 이전 일제 강점기를 겪고, 군부 정권을 겪었던 우리나라와 닮았으니까요. 저도 이 괴로운 상황에 몰입이 되어 처음 봤을 때 잔상을 지금까지 가지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 영화를 두 번째 볼 때, 몰입과 더불어 객관적 시각으로 바라볼 수 있게 되었는데요, 이에 따른 리뷰를 추가해서 설명해드리고자 합니다. - 지극히 주관적이므로 참고 할 것! 그리고 스포일러가 다량 내포되어 있습니다.- 영화는 첫 장면에 당시 치열했던 아일랜드의 상황을 몇 문장의 해설문으로 보여줍니다. 그리고 한 밤중에 –아일랜드 인으로 추정되는- 시위대 사람들 중 한 여인이 시위의 일환으로 길에 앉아 무언 갈 두드립니다. -첫 장면부터 기마부대가 전쟁을 위해 말을 달리는 것과 같은 소리가 굉장히 흡인력 있지요. - 그리고 화면이 뚝 꺼지면서 작은 글씨로 제목을 보여줍니다. 이로써 시위대가 굉장히 치열한 것을 알려주는데, 그 다음 장면은 조용한 가정에서 반지를 빼서 손을 담가 씻고, 정돈된 옷을 입고 깔끔하고 고요한 한 남자의 생활이 비춰집니다. 그리고 일터에서 보여주는 일상들을 통해 그의 직업을 알 수 있게 하지요. ‘간수’. 어느 집이든지 성실히 일하는 가장의 모습이라면 이런 모습이라 생각합니다. 그리고 IRA 출신으로 처음 수감되는 죄수가 나옵니다. 제가 간략하게 설명한 영화 초반부만 보더라도 주인공 ‘보비 샌즈’는 등장하지 않습니다. 그 의도가 어떤 걸까요? “당시 ‘보비 샌즈’가 저항했던 모습을 생생하게 전하고 싶었습니다. 그의 순수한 행동은 역사적 사건이 되었습니다.” - 스티브 맥퀸 스티브 맥퀸 감독은 영화 ‘헝거’를 소개할 때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그만큼 보비 샌즈의 역할을 두드러지게 표현하는 데 주력했다는 사실입니다. 하지만 정작 영화 초반부가 끝나도록 보비 샌즈는 나타나질 않았습니다. 전 그만큼 스티브 맥퀸 감독이 역사적 사실을 다루는 데 있어 탁월한 연출을 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보통 실화를 바탕으로 만든 영화라면 주인공을 처음부터 내세워 그의 전기를 알려주고, 더욱이 주인공에 힘을 실어 영화를 전개하는 방식이 대부분입니다. 하지만 스티브 맥퀸은 ‘헝거’를 연출하면서 자칫 과열이 될 수 있을 실화 영화를 한 발짝 물러서서 관망하는 방식을 택했습니다. 즉, 실화를 바탕으로 만들었지만 ‘중립성’ 또한 지킨 셈이지요. ‘실화’는 현실 세계에 있던 ‘사실’을 진실성을 숨기지 않고 그대로 극화시킨 것이라고 정의내리고 싶습니다. 당연한 말을 거창하게 말한 것이지요. 하지만 그 ‘실화’를 다루는 데 있어 생각해 봐야 할 점이라면 전 ‘미화’ 나 ‘지나친 편중’을 경계해야 되는 점이라고 생각하는데, 그 연유인 즉 영화를 바라보는 관객의 입장을 고려해야하기 때문입니다. 한 편으로는 과열이 된 작품에서 극찬을 아끼지 않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이에 불편함을 느끼는 사람들 또한 있을 것이고, 관련이 없는 사람들 또한 이를 바라볼 때 느끼는 점이 천차만별이기 때문에 실화를 각색하는 것은 연출가, 작가의 밑바닥부터 끌어올려 완성할 순수 창작 보단 쉬워 보이지만 순수 창작보다 실화를 다룰 때 중용을 고려하는 것이 여타 다른 장르보다 더 중요해지고, 더 어려운 작업일 수 있다는 겁니다. -물론 보는 사람의 입장을 무조건적으로 수용하고 고려해 ‘자신의’ 작품을 망각하는 것 또한 그릇된 창작활동이겠죠. - 자유롭게, 더 나아가 도드라지게 표현하고 싶은 인물이 있고, 이야기가 있고, 그 이야기로 밀고 나가는 것은 나쁜 게 아닙니다. 실제로 우리가 사건을 접했을 때 받아들이는 방식이 다르듯이 –아까 설명 했지요- 표현하는 데 있어 같은 사실이라도 다르게 작품을 만들 수는 있습니다. 허나 ‘중용’을 지키는 것은 여운과 감동을 오래 남길 수 있다. 관객들로 하여금 생각할 여지를 더 보여줄 수 있다. 는 건 부정하지 못할 진심어린 사실이지요. 그 ‘객관화’를 맥퀸 감독은 ‘헝거’에서 보여주었고, 그 탁월한 연출 방식은 초반부 이후에도 등장하게 됩니다. 이를테면 ‘헝거’의 명장면 중 하나인 IRA 검열 장면이 있지요. 실제로는 –영화 스토리 상- 영국 간수들의 심한 모욕에 분노를 크게 느낀 IRA 단원들의 반항이 주된 이유이지만 ‘검열’, 즉 그들이 몰래 교신했던 행위를 확인시키기 위해 경찰 병력을 투입해서 그들에게 물리적 폭력을 행사합니다. 방패막에 곤봉을 두드려 소음을 일으키고 그 가운데 폭력을 행사하는 장면을 정신없이 카메라에 담습니다. 이 때, 경찰 병력 인원 중 한 청년이 교도소로 출동하기 전부터 긴장이 역력하더니, 폭력이 시작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한바탕 난리가 벌어진 교도소 구석에 홀로 엉엉 울고 있었습니다. 죄책감에 시달리게 된 거죠. -그저 폭력에 익숙하지 않은, 순수한 공포감에 그럴 수도 있겠습니다만- 세상엔 비정상인 것도 단체로 합리화를 시키면 이에 대한 죄책감 없이 비정상적인 행위를 하는 사람들이 있는 반면에 자신의 양심에 가책을 느끼고 동참하지 않는 사람들 또한 있기 마련이지요. 그리고 맨 첫 장면에 나온 간수의 일상과 더불어 그가 살해당하는 장면 또한, 간수의 바깥 일상과 교도소 내의 폭력성의 양면성, IRA의 독립을 위한 정당한 투쟁과 정당치 못한 살육의 양면성을 보여주기도 합니다. 간수가 손을 물에 담그는 장면이 약 세 차례 보여 지는데 그 속에서 간수의 표정에서 알 수 있듯이 폭력에 대한 자신의 감정이 긍정적이지도, 부정적이지도 않은, 그저 계속해야 하는 물리적 폭력에 대한 노곤함과 지친 감정이 깃들어 있지요. 그는 업무상 해야 하는 일을 하는 것에 대해 늘 긴장하고 살아가는 것에 대해 중압감을 느꼈겠지요. 물론 집안 상황과 더불어 살해 위협까지 고려해야 했으니까요. 이런 장면들을 보면 확실히 IRA 수장인 보비 샌즈만을 위한 영화에서 더 나아가 거듭되는 물리적 폭력과 복수, 권력층의 무정하고 냉혹한 면모에 대한 비판을 담을 수 있는 영화가 된 것입니다. - 지금까지 말씀 드린 리뷰에서 제가 언급한 사실들은 실화영화, 특히 권력의 무자비한 속박과 독립을 위한 투쟁을 다루는 이야기에서 둘 사이의 갈등이 편중됨이 아닌, ‘중립’을 지키고 있다는 점을 특별히 짚고 넘어가는 것이지 정작 주인공인 보비 샌즈, IRA 의 활동이 의미가 없거나 그들에게도 잘못을 묻겠다는 입장이 아님을 알려드립니다. 이 리뷰를 보시기 전에 보신 분들이라면 보비 샌즈의 존재감과 더불어 신념 등이 굉장히 강렬하게 다가온다는 사실을 느낄 것입니다. 노파심에 말씀 드린 거구요, 리뷰, 계속 진행하겠습니다. - 또, 이 영화에서는 독립을 위한 강력한 신념과 종교적 신념간의 뜨거운 갈등을 나타낸 영화이기도 합니다. 같은 아일랜드 국민이면서 신념 차이가 벌어지게 된 까닭은 무엇일지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영화 ‘헝거’에서 최고의 명장면을 하나만 뽑으라고 한다면 어렵겠지만 역시 16분의 원 테이크 안에서 대화를 주고받는 보비 샌즈와 신부의 대화입니다. 이 대화는 걸핏 지루하게 느껴질 수 있겠습니다만 조금 더 관심을 가지고 귀를 기울이신다면 ‘투쟁’에 관한 실존적 갈등이 이어집니다. 보비는 이렇습니다. ‘IRA 뿐 아니라 영국의 지도하에 속박 당한 아일랜드 국민의 독립을 위해 목숨을 바치려 했지만 기약 없는 독립에 있어 우리들의 신념이 무너져 실패하게 되었다고. 하지만 이번에 자기 자신부터 시작하려는 단식투쟁은 그 신념을 굳히고 목숨을 내놓겠다.’라고 주장합니다. 이에 맞서 신부는 이렇게 주장하지요. ‘IRA에 의해 죽어간 사람들, 또 그릇된 신념 –그가 주장하는, 죽음을 강요하는- 으로 인해 사람들이 죽고 나면 그 투사들의 가족과 더불어 주변 친구들, 이웃들 또한 고통을 주고 피해를 준다. -(기독교적 관점으로) 하느님이 정해주신 죽음 이외의 자의적 죽음은 죄에 속하지요- 그리고 전 세계가 다 알고있는 아일랜드 인의 핍박에도 불구하고 대처 –를 비롯한 영국의 권력층-는 귀를 닫는 것을 인지한다면 투쟁은 실패를 맞이할 수 있다.’라고 합니다. 신념에 의한 갈등. 독립을 위한 투쟁인가 아니면 생명 존중과 더불어 평화적인 방법인가에 대한 갈등이었습니다. 물론 둘의 신념은 다르더라도 독립에 대한 열망과, 아일랜드의 자유에 대한 마음은 같을 거라고 봅니다. 우리나라에서도 독립을 위해 투쟁한 의사, 열사 분들을 기억한다면 그들의 희생이 있기에 지금 우리나라가 있는 것이죠. 절대 헛된 일들을 하신 분들이 아닙니다. 그들은 과연 정해져 있는 독립일이 있기에 자신을 희생하는 선택을 하셨을까요? 하지만 ‘신념’의 합리화, 집단성의 경계에 대해서도 고찰해야 할 문제일 겁니다. 이미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나치에 동조한 사람들, 제국주의에 가담했던 일제 강점기의 일본, 민주화를 위해 노력한 열사들을 고문한 형사들........ 심지어 영화상에 나타난 경찰 병력들의 무자비한 폭력 또한 그들의 신념에 정당성을 부여받고, 그런 집단이 형성되어 죄의식과 시시비비가 분산되고, 그렇기 때문에 아무렇지 않게 사람을 죽이고 집에서 똑같은 가장으로, 가정의 구성원으로 존재하는 문제가 발생하지요. 그런 집단의 신념은 주로 ‘갑’이 되는 이들에게 벌어지지만 ‘을’이 되는 이들에게도 번질 수 있다는 점을 명시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극 중, 신부의 의견을 빌리자면- 프랑스의 왕권 부패를 비판하고 들고 일어난 혁명가들이 프랑스 혁명을 이루었습니다. 하지만 그들 또한 실세가 되고나니 왕권과 다를 바 없는 부정부패를 일삼게 되었습니다. 신념이 그릇되면, 또 그 그릇된 신념이 모이게 되면 살육도 아무렇지 않은 일이 될 것을 신부는 염려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결국, 의견은 좁혀지지 않았습니다. 그 둘의 차이가 ‘신념’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객관적으로 바라보는 우리 또한 정확한 해답을 내릴 순 없지만 둘의 의견 중 누가 맞고 그른 것인지는 판단하기 힘들지요. 관객인 우리들이 생각하는 바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한 가지 간과되어서는 안 될 사실이 있습니다. 끝이 나지 않을 그들의 논쟁은 과연 그들이 그저 단순히 담배를 피며 말싸움 하는 것으로 그치는 것뿐일까요? 대화를 들여다보면, 또 영화를 가만히 들여다보면 그들이 공통적으로 해결해야 하는 문제점을 인식하고 있습니다. 국민들을 탄압하는 정부, 반란군을 지지한다면서 정작 발을 들여놓지 않은 정부-후자의 정부는 독립을 지원하는 아일랜드의 정부겠지요-. 그들의 손익에 의해 많은 이들이 고통 받는다는 사실을 인식해야 합니다. 보비의 일생, 그가 IRA에 참여하게 된 경위 등을 보여준 장면은 영화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대화나 늬앙스를 통해 인식할 수 있지요. 하지만 실제로 보비 샌즈가 독립단체에 참여하게 된 근본적인 이유는 시위 중 영국 무장 군인의 무력 진압으로 사상자가 발생하면서 시작되는 것이죠. 실은 보비 샌즈가 구교도이긴 하지만 그리 독실한 편은 아니었다고 합니다. 영국에 가서 운동선수로 활약한 것을 보면 그가 반감은 가지고 있었겠지만 사건이 일어나기 전까진 그저 평범하게 삶을 살아가고 있었겠지요. 권력층에 대한 개탄과 동시에 공분을 샀으니 뚜렷하게 그의 목적과 신념을 알 수 있습니다. 대화 중간, “자살하려는 생각이냐.” 라는 질문에 “자살이 아닌, 사회적 타살.”이라는 말을 합니다. 그가 가정이 있다는 사실을 봤을 땐 정말 무모한 행위를 벌이는 것이지만 그는 대화 후반부에 자신의 옛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유년시기) 선수시절, 시합을 하기 위해 영국에 한 시골마을에 갔는데, 영국 선수들이 한 것으로 보여진, 고통스럽게 죽어가는 염소 한 마리를 발견했다. 우리 팀은 이에 대해 다양한 의견을 제시했지만 정작 나서서 해결하려는 사람이 없었다. 이 때 멀리서 신부님이 노발대발하며 뛰어 왔다. -보비와 친구들이 염소를 죽인 것으로 착각- 다들 두려워하며 어쩔 줄 모르고 있을 때 보비는 그 자리에서 염소를 익사시켜 죽여버렸다. 그리고 보비는 신부님께 끌려가 흠씬 두들겨 맞았다.’ 보비의 유년시절 이야기는 보비의 신념을 나타내는 가장 확실하고도 중요한 이야기일 겁니다. 오해를 받아 고통을 받든 어떻든 자신이 직접 책임을 질 거라는 이야기지요. 굳이 보비가 유년시절부터 청년시절, IRA에 들어가게 된 계기 등을 카메라 안에 담지 않아도 확실히 알 수 있습니다. 보비는 그렇게 단식투쟁을 벌이게 되고 그의 몸은 성한 곳 없이 굉장히 심하게 마르고, 죽음이 임박한 채로 보여집니다-보비 샌즈를 연기한 마이클 패스벤더의 연기력과 더불어 혹독한 체중감량은 소름을 자아내게 합니다-. 등엔 고름이 잡히고 심박수도 낮아지고 체내 장기의 기능이 현저히 약화됩니다. 볼 일을 볼 때는 어김없이 피가 나오지요. 영화는 보비의 투쟁을 장엄한 음악을 넣는다거나 그의 투쟁이 교도소 밖의 투쟁과 오버랩해서 보여주는 등의 연출을 전혀 하지 않았습니다. 그저 개인 한 사람이 처참하게 죽어가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지요. -후반부 장면 중 영국 무장 군인 출신의 의사와 조우한 보비가 그 앞에 대항하기 위해 힘든 몸으로 억지로 일어서다 실신하는 장면이 있는데 정말 안타깝고 눈물 짓게 되 더 군요-. 그가 오버랩하는 모습은 그와 똑같이 운동선수로 조깅을 하고 있는 아들의 모습입니다. 마지막 눈물과 동시에 눈을 감는데 그 때의 보비는 어떤 생각을 하고 눈을 감게 되었는지 불분명합니다 -도리어 아들 생각을 한다는 점이 더 가깝겠군요-. 영화가 마무리 되면 보비 이후 진행된 단식 투쟁으로 7명이 사망했고, 영국 정부는 IRA 수감자들의 요구를 들어줬지만 독립을 인정하진 않았다. 하는 냉정하고도 간결한 문구가 적혀 있습니다. 현실적으로 그들의 완전한 목표는 이루어지지 않았지요. 하지만 그렇게 냉정하고 한이 서린 세상 속에서 꺼질 수밖에 없던 성냥은 온 힘을 다해 그 불빛을 내 보였고, 이와 동시에 그 성냥이 잔혹하고도 고통스럽게 꺼져가는 모습 또한 우리는 목도할 수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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