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umgik
junbumsun · 4 yea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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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머니 역사 제1편 <이영훈전>
전범선
조부모님을 만나면 딱히 할 말이 없다. 안부를 묻는 것 이상으로 대화가 진전되기 힘들다. “건강이 제일이다.” 할아버지가 매번 내게 하시는 말씀의 전부다. 그래서 시도를 해봤다. 역사가의 궁금증으로 조부모님 살아오신 이야기를 여쭤보았다. 외할아버지는 귀가 안들리시고 친할아버지는 몸이 안좋으셔서 결국 양쪽 할머니들의 증언에 의지할 수 밖에 없었다. 종합해보니 한국 근현대사의 단면이 극적으로 드러났다. 나의 외할머니 이영훈과 친할머니 박희순. 두 여인의 삶은 국사 교과서에 한 줄도 나오지 않는다. 그러나 그것은 어느 대통령의 업적보다도 나의 존재에 큰 영향을 끼쳤다. 내가 역사를 쓴다면 이영훈과 박희순의 이야기부터 쓰는 것이 옳다.
요컨대 할머니들의 삶은 한의 역사다. 공부도 못하고 중매결혼하고 피난 다니고 자식 많이 낳아 키우느라 고생하고 다 키우고 나니 늙어서 몸이 아프다. 여기까지는 우리네 할머니들의 뻔한 이야기다. 그러나 나는 이번에 몇 시간 동안 할머니들을 경청한 후 결론지었다. 이영훈과 박희순을 그저 “한 많은 두 여인”으로 치부하는 것은 치명적인 역사적 오류다. 그들은 내가 생각했던 것 만큼 수동적이고 힘없이 살지 않았다. 가부장제라는 배에 갇혀 왜정과 해방과 전쟁과 가난의 탁류에 휩쓸렸지만 그들은 그 속에서 꾸준히 노를 저었다. 덕분에 나는 지금 안락하고 높은 섬에 앉아 그 탁류를 되돌아본다.
이영훈의 어머니는 유범학이었다. 그 부모가 아들이 없어서 이름을 남자처럼 지었다고 한다. 유범학은 학교는 못나왔지만 한글은 읽을 줄 알았다. 이영훈의 아버지 이창원은 호방하고 인자했다. 손녀들이 오면 발가락으로 꼬집곤 했다. 가방끈도 짧지 않았다. 의정부농업학교 1회 졸업생이라는데 내가 확인해 본 바 연도가 맞지 않는다. 어쨌든 이창원은 동네에서 꽤 배운 사람 축에 속했다. 언제나 양복을 입고 다녔다. 바이올린을 켰고 일본어를 잘했다. 그래서 잠시 교편을 잡았고 군청 공무원으로도 오래 일했다. 즉 이창원은 일제에 순응하며 그 국가제도의 하부관료로 충실히 살았다. 이영훈은 그 덕에 큰 경제적 어려움 없이 어린 시절을 보냈다.
이영훈은 팔남매 중 맏딸이었다. 여자라서 학교는 국민학교만 다녔다. 이창원이 비교적 개화한 아버지였어서 그런지 이영훈은 성격이 당차고 왈가닥스럽게 자랐다. 이창원은 해방 후에도 대부분의 친일 관료들처럼 별 탈 없이 살아갔다. 일본인들과 가까이 지내면서도 호감형 성격 때문에 마을 인심을 잃지 않았다. 미군정과 이승만 때는 교장 자리도 제안받고 그밖에 감투 쓸 기회가 몇몇 있었다. <태백산맥>의 염상진이 잡았으면 인민재판에 세운 후 총살했을 법한 인물이다. 이창원은 선견지명이 있었는지 감투를 모두 거절했다. 한국전쟁이 끝나고 이창원은 가족들에게 큰소리 쳤다. “거봐라 내가 교장 해먹었으면 빨갱이들 손에 벌써 죽었을 거다.” 그는 그후 낚시를 즐기며 여생을 보냈다.
따라서 이영훈이 1949년 임봉빈과 혼인할 때 즈음엔 가정 형편이 왜정 때 만큼 좋지 못했다. 그 당시 결혼의 법칙이 있었다면 여자는 주로 자신의 가문보다 경제적, 사회적으로 살짝 더 낮은 가문의 남자와 짝지어진다는 것이었다. 임봉빈의 집안은 그리 지체 높지 않았다. 아버지 임영순은 광산을 다니며 장사를 했다. 정확히 무얼 팔았는지 모르겠으나 이영훈의 표현을 빌리면 “젓가락 꽂을 땅도 없었다.” 절대 양복을 입지 않았고 유교사상만 고집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임봉빈과 첫날밤을 보내게 된 이영훈이 마냥 불만에 차 있지는 않았을 것이라 나는 감히 추측한다. 왜냐. 나의 외할아버지 임봉빈은 퍽 잘생긴 외모에 웃는 모습이 따뜻한 귀공자 부류의 남자였으니까.
귀공자는 연인으로서는 매력있으나 전쟁과 가난의 동반자로는 부적절할 수 있다. 임봉빈이 그랬다. 나긋나긋한 말씨와 미소는 뭇 여성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실제로 그에 대한 짝사랑이 좌절되자 스스로 목숨을 끓은 여인도 있었다! 그러나 시대는 그렇게 말랑말랑한 남자를 원하지 않았다. 박정희나 정주영처럼 기회를 사정없이 낚아채 밟고 올라설 수 있는 인물이 출세했다. 착하면 도태되었다. 임봉빈은 철도 경찰에 들어갔다가 얼마 안 되어 총기 오발로 해고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경찰학교에 재입학해서 다시 경찰이 되었다. “사관학교나 갈 것이지 맹추같이 경찰학교는 왜 또 가!” 이영훈은 70년 가까이 지난 지금도 임봉빈의 진로 선택이 불만이다. 임봉빈은 왜 그렇게 경찰이 되고 싶었을까?
해방공간의 경찰은 곧 동네 권력이었다. 어릴 적 임봉빈은 시정잡배들에게 얻어맞고 다녔다. 곱상하고 인기 많으니 재수 없어서 한 대 때리고 싶었나보다. 임봉빈은 경찰이 되어 꼭 복수하고 싶었다. 복수까진 아니어도 경찰이 되면 적어도 맞지는 않을 테니깐. 임봉빈은 모범 경찰이었다. 너무 훌륭한 나머지 남들 다 받는 뇌물을 요구하기는커녕 잘 받지도 못했다. 이영훈은 속이 터졌다. 어째 부부의 성격이 전통적인 성역할과 반대였다. 이영훈은 남자였으면 어떻게든 높은 자리 하나 차지했을 재목이었다. 임봉빈은 치열하게 사는 것보다 인생을 아름답게 즐기고 싶었다. 둘이 서로 얼마나 답답했을까.
1950년 6월 22일, 임봉빈은 남쪽 어느 도시로 발령받아 홀로 떠났다. 이영훈이 전쟁의 참화를 피해 갓난 딸을 데리고 남편을 찾아갔을 때, 그는 이미 첩을 들인 상태였다. 임봉빈 입장에서도 원하는 결혼을 한 것은 아니었고 그 인기에 여자 없이 사는 것도 이상했다. 하지만 이영훈은 당연히 화가 났다. 한의 역사가 시작된 것이다. 우리네 할머니들은 “아이고 저런 영감이랑 결혼한 내가 병신이지” 또는 “내가 그때 죽었어야지” 등의 자기비하적 한탄을 입에 달고 산다. 중매결혼 내지 조혼이 그들에게 가하는 평생의 고문이다. 배우자 선택에 아무런 자유가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할머니들은 스스로 탓한다. 그것 말고는 다른 대응, 예를 들어 남편에 대한 반항 또는 이혼을 할 자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53년 서울로 돌아왔을 때였다. 노량진에서 용산 가는 한강철교 앞에서 이영훈, 임봉빈, 그리고 네 살배기 딸이 헌병에게 가로막혔다. 임봉빈은 경찰 신분이라 통과됐다. 하지만 이영훈은 신분증이 없어서 열차를 탈 수가 없었다. “난 여기서 죽든지 살든지 알아서 할 테니까 혼자 가요.” 그랬더니 임봉빈은 진짜 갔다. 이영훈은 지금도 후회한다. “내가 그때 갈라섰어야 하는데!” 그러나 갈라서면 어디로 간단 말인가. 애 딸린 여인 혼자 살기 녹록한 세상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이영훈도 호락호락한 여자가 아니었다. 임봉빈이 탄 기차가 칙칙폭폭 출발할 때 이영훈은 잽싸게 열차 꽁무니에 매달렸다. 아기를 등에 업은 채. 당황한 헌병은 이영훈의 다리를 붙잡고 같이 열차에 올라탔다. 그리고 그 상태로 한강철교를 건넜다. 아낙네 하나 못 건너게 하려고 한강에 빠뜨릴 수는 없지 않은가. 이영훈은 여걸이었다.
1962년 이영훈은 다섯째 딸을 낳았다. 그게 우리 엄마다. 그후 아들 보려고 한 번 더 낳았는데 또 딸이었다. 결국 딸만 여섯이다. 이영훈은 시어머니와 사이가 좋지 않았다. 임봉빈의 어머니 심사랑은 언문도 깨치지 못하고 지아비를 섬기기만 했다. 맏며느리 이영훈이 아들을 못낳는 게 심히 못마땅했을 것이다. 이런 일도 있었다. 시아버지 임영순이 첩을 얻어서 지금의 춘천 소양강댐 쪽에 들어가 살고 있었는데, 그 첩이 이영훈보다 딱 두 살 많았다. 그것도 모자라 임영순은 며느리 이영훈에게 돈을 좀 보내라 했다. 싫다 했더니 “내 아들이 번 돈을 왜 네가 안 주냐”고 호통했다. 결국 이영훈은 소양강에 찾아가서 한바탕 했다. 그 첩은 곧 술을 많이 먹어서인지 죽었고, 본처 심사랑은 십년 넘게 중풍을 앓다 갔다. 임영순 본인은 장수했다.
임봉빈은 파주 파출소장까지 했다. 지리산에서 빨치산 토벌도 했다. 독재자들에게 훈장이랑 표창장은 많이 받았으나 여전히 뒷돈은 챙길 줄 몰랐다. 그래도 한동안 밥 굶을 걱정은 없었다. 이영훈은 이승만 때는 자유당, 박정희 때는 공화당 선거운동에 열렬히 앞장섰다. 이후락이 먼 친척이라고 동네방네 자랑했다. 그러나 박정희가 죽을 때 쯤 임봉빈은 경찰에서 은퇴할 수 밖에 없었다. 그때부터 고난의 행군이었다. 이영훈이 잡일을 하며 겨우 생계를 유지했다. 인형 눈알도 박았다.
이영훈은 1980년 처음 교회를 찾아갔다. 순복음교회였는데 종파는 사실 중요하지 않았다. 평생 거슬리기만 하던 교회 종소리가 갑자기 궁금해졌다. “하나님 아버지처럼 좋은 사람이 어딨어. 하나님 없었으면 난 벌써 자살했을 거야.” 교회는 여성들도 나름 목소리를 낼 수 있는 공간이었다. 기독교 집단도 남성 중심적이었지만, 유교적, 군국주의적 사회를 살아온 여인에게는 상대적으로 숨통이 트이는 곳이었다. 이영훈은 곧 임봉빈도 교회에 데려갔다. 나의 외가는 지금도 대부분 개신교도다.
교회는 위안이었다. 그러나 가난을 해결해주진 않았다. 딸부자집에서 밥숟가락을 줄이는 방법은 시집 보내기였다. 그리하여 이영훈은 1983년 지금의 롯데백화점 청량리점 자리에 있었던 대왕코너 6층 브라운호텔 커피숍에서 한 또래 여인과 역사적 만남을 갖는다. 대학동기로 갓 연애를 시작했던 나의 부모는 조용히 옆에 앉아있었다. 이영훈은 나의 친할머니 박희순과 일사천리로 혼인에 합의했다. 아빠 말로는 “우린 가만히 있는데 자기들끼리 죽이 척척 맞아서 맘대로 날짜를 잡았다.” 박희순은 춘천의 유지였다. 집 마당에 사슴이 있었다. 그러나 박희순이 항상 돈이 많았던 건 아니었다. 이영훈이 비운의 여장부였다면 박희순은 운과 꾀를 겸비한 사업가였다. 판잣집에서 시작해서 사백 평짜리 기와집을 산 여자였다.
(제2편 <박희순전>에서 계속)
할머니 역사 제2편 <박희순전>
전범선
박희순은 나의 조부모 중 가장 유복하게 자랐다. 그의 아버지 박이용은 일제의 태평양전쟁에 적극 협력한 군수업자였다. 군량 조달을 했다. 대전에 이층짜리 양옥집이 있었다. 박이용의 친일은 뛰어난 상업적 수완의 당연한 귀결이었다. 그러나 그 혜택은 단순히 경제적인 것을 뛰어넘었다. 박희순은 중학교 시절 근로정신대에 지원하려 했다. 일본에서 공부를 시켜준다거나 월급을 후하게 준다는 꼬임에 넘어간 또래 친구들이 숱하게 많았다. 박희순도 그대로 갔으면 험한 꼴을 면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위안부로 끌려갔을 수도 있다. 그랬으면 난 없다. 그걸 막은 게 바로 박희순의 어머니 송인분이다.
그렇다. 이름이 인분이라니! 당시 딸 이름 짓기를 얼마나 똥같이 여겼는지 알 수 있다. 송인분은 박희순의 학교를 찾아가서 “이 년이 미쳤다고 거길 따라가냐”고 말렸다. 남편이 일본군과 장사를 하는데 정신대가 뭔지 모를 턱이 없었다. 결국 정신대에 간 사람은 1) 그게 뭔지 몰랐거나 2) 알아도 너무 가난해서 차라리 가는 게 나았거나 3) 강제로 끌려간 것이다. 박희순은 부모가 일제에 빌붙어 영리하게 살았기 때문에 재앙을 모면했다. 정신대에 간 친구들을 박희순은 영영 다시 보지 못했다.
해방 후에도 박이용의 부는 한동안 지속됐다. 친한 일본인이 도망가면서 토요타 트럭 두 대를 줬다. 적산 가옥도 챙겼다. 일본군에 납품하던 것을 이제 교도소에 했다. 흔히들 친일파 청산 실패를 논할 때 “일제 때 독립투사 잡아 고문하던 놈들이 해방 후 빨갱이 죽이는 ‘애국지사’로 변신했다”고 분개한다. 박이용은 직접 그러진 않았지만 그런 이들에게 남새와 곡식을 팔았다. 하지만 교도소 장사도 한국전쟁을 전후로 점차 기울었고 박희순의 집안은 일제 때 지위를 되찾지 못했다.
박희순은 1947년 전만영과 결혼했다. 이영훈처럼 박희순도 맏딸이었다. 부잣집 맏딸이 시집가면 돈이 샌다고 박이용은 데릴사위를 원했다. 그래서 데려온 게 대전 ‘동일여관’에서 ‘조바’蜉보던 전만영이다. 전만영은 나의 조부모 중 가장 어렵게 컸다. 그의 부모 전제선과 김갑순은 일찍이 세상을 떴다. 전만영은 국민학교만 나왔다. 수십리를 걸어서 등하교했다. 그래도 영특해서 학급회장까지 했다. 일본인 교장 덕에 경북 상주 대표로 뽑혀서 일본 구경을 하고 온 것은 지금도 자랑거리다. 물론 가서 신사 참배도 했을 것이다. 그때가 전만영 십대의 전성기였다. 그 후론 뼈 빠지게 일만 했다. 평양에서 방직공장 일 좀 하다가 열여덟 살 때 만주로 갔다.
일제시대 후반 조선의 무산계급에게 만주는 마지막 희망이었다. 소작농, 도시빈민, 화전민이 되기 싫으면 간도로 가야했다. 전만영은 일제가 만주국 안산에 건설한 대규모 제철단지에서 일했다. 광부는 아니었고 공장일을 했다. 미 공군 B-29기가 안산을 폭격하던 1944년까지도 전만영은 방공호를 전전하며 계속 일했다. 그래도 수입은 괜찮았다. “면장도 100원 벌 때 120원 벌었다.” 해방 직전 고향에 돌아올 때는 그 큰 돈뭉치를 혹 군경에게 뺏길까봐 속옷에 넣어왔다. 그러나 정작 돈을 빼앗아간 건 큰 형이었다. 아버지가 없는 집안에서 큰 형은 절대 권력자였고 전만영은 개인 재산 불리기가 쉽지 않았다. 박희순과 결혼할 때도 전만영은 여전히 무산자였다. 이영훈이 임봉빈 집안은 “젓가락 꽂을 땅도 없었다”며 자신의 혼전 경제적 우월성을 기억하듯 박희순도 그 점을 절대 잊지 않았다. 데릴사위였다. 데릴사위. 나의 할머니들이 지금껏 할아버지들에게 갖고 있는 불만, 즉 평생의 한은 바로 이 우월감에서 비롯된 억울함이다. “내가 왜 이런 남자랑 결혼해서 그 고생을 했나.” 사실 우리 할머니 세대는 어떤 남자랑 결혼을 했어도 고생했을 가능성이 압도적이다. 그러나 그 배우자를 자신의 부모가 단순한 경제적 논리에 의해 일방적으로 결정했다는 점은 억울함을 가중시켰다. 어린 박희순은 결혼하기 싫다고 도망가다가 어머니 송인분에게 잡혀 “쎄 빠지게 맞았다.”
박희순의 아버지 박이용은 전만영의 착실함이 마음에 들었다. 장인과 사위 간의 관계도 좋았다. 그러나 전만영의 대전 처가생활은 오래가지 않았다. 곧 징병되었기 때문이다. 전만영은 원주 제6보병사단에 배치되었다. 부대마크 때문에 청성부대라고도 불리는 6사단은 춘천을 방어했다. 전쟁 초기 인민군에게 밀리지 않은 유일한 국군부대다. 그러나 희생은 엄청났다. 전만영 말로는 “다 죽고 나만 살았다.” 왜? 전만영은 보급병이라 후방에 있었다. 그가 보급병으로 뽑힌 이유는 단순했다. 글을 읽고 쓸 줄 아는 사람이 그 밖에 없었다. 수십리 걸어서 국민학교 다닌 노력이 목숨을 살렸다. 내 조부모 중 전만영이 가장 어렵게 자랐다고 했지만, 전우들에 비해서 그는 매우 운이 좋은 편이었다.
청성부대는 압록강 물도 가장 먼저 떠다 이승만에게 바쳤다. 그러나 결국 다시 밀려 내려와 휴전선 중부 지역에 머물렀다. 대전 처가에서 첫 아들을 낳고 생활하던 박희순은 남편을 찾아 직접 강원도로 가기로 결심했다. 원주와 춘천 중 고민하다가 대전서 알던 어떤 이가 마침 춘천으로 이사갔길래 따라갔다. 갓난 아기 데리고 빈 몸으로 주소 하나 딸랑 들고 고향을 떴다. 이영훈이 전쟁통에 임봉빈을 찾아 떠났던 것처럼. 그리하여 박희순은 춘천 땅에 둥지를 틀었고 전만영도 제대 후 춘천에 살게 되었다. 내 고향이 그래서 춘천이다.
처음에 박희순은 판잣집에 살았다. 가진 것이라고는 학교에서 배운 미용 기술 밖에 없었다. 자격증이 있어서 일단 미장원 일을 시작했다. 전만영은 땔감 장사를 했다. 그럭저럭 살았다. 박희순이 그러다 처음 재미를 본 사업은 구멍가게였다. 가게 자체는 그냥 시장 골목에 있어서 특별할 게 없었다. 하지만 박희순은 아버지 박이용을 보고 배운 게 있었다. 사업을 하려면 권력과 친해야 한다. 박이용 시대 한반도 최고 권력이 일본군이었다면 박희순 시대에는 미군이었다. 박이용은 일본군에게 군량을 조달하며 돈을 벌었지만 박희순은 미군부대에서 나오는 자투리 군량을 팔아 이득을 챙겼다. 춘천 캠프 페이지에 출입하는 국군 장교들과 친해진 후 모종의 계약을 맺고 미 군량 및 용품을 공급 받기로 한 것이다. 그 장교들이 물건을 어떻게 구해오는지는 묻지 않았다. 가장 잘 팔리는 건 건빵이었다. 박희순은 훔친 미군 건빵 팔아서 모은 돈으로 곧 소양로에 마당 딸린 집을 샀다. 마당에서는 질 좋은 미군 짬밥으로 돼지도 키웠다.
박희순은 1960년 그 집에서 넷째이자 막내 아들을 낳았다. 그게 우리 아빠다. 이영훈은 아들 낳으려다가 딸만 여섯 낳았는데 박희순은 딸 낳으려다 아들만 넷 낳았다. 아빠는 배고픔 모르고 자랐다. 박희순의 사업도 막내 아들 키 크듯이 무럭무럭 번창하다가 곧 일대 전환기를 맞았다. 바로 ‘동일문구사’ 개업이다.
동일문구사는 박희순, 전만영 부부의 최대 업적이다. 지난 반세기 동안 그들은 춘천 바닥에서 ‘동일문구사집’으로 통했다. 자, 춘천에 가면 명동이란 곳이 있다. 서울 명동의 축소판 정도로 생각하면 되는데 말이 ‘동’이지 거의 그냥 골목길 하나다. 그래도 강원도에서는 제일 번화가다. 그런 명동에서도 가장 중심지라고 할 수 있는 법원 앞 교차로 건물에 떡하니 가게를 연 것이다. 땅값이 한 때 강원도 최고였다는 말도 있다. 그런데 이러한 명당자리를 얻게 된 사연이 퍽 기괴하다.
박희순은 당시 춘천 시내 재력가 부인들과 촘촘한 인맥망을 형성하고 있었다. 변호사집, 의사집, 빵집, 양복집 등등. 그 중 한 명이 어느날 박희순을 찾아와 아주 좋은 자리가 나왔다고 귀띔해줬다. 원래 거기서 장사하던 사람한테 쪼그만 아들이 있었는데 그 아들이 가게 앞에서 놀다가 지나가던 미군 차량에 치어서 “모가지가 똑 떨어져 데굴데굴 굴러서는 문 앞에 섰다”고 한다. 그 광경을 본 부모가 아들이 죽은 자리에서 계속 장사를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들에게는 엄청난 불행이었지만 박희순에게는 절호의 기회였다. 전만영이 대전에서 일했던 여관 이름을 따서 ‘동일문구사’ 간판을 내걸었다. 벽지랑 장판도 팔았다. ‘비니루 장판’이 특히 불티나게 팔렸다. 60년대 중반부터 70년대 후반까지 동일문구사는 그 자리에서 명동 상권을 풍미했다.
서울 여자인 우리 엄마가 춘천 남자인 우리 아빠를 인천의 대학에서 만나서 처음 춘천으로 놀러왔던 1980년. 박희순은 이미 은퇴 후 춘천 외곽에 고래등같은 기와집을 짓고 살고 있었다. 배고플 일은 이제 없었지만 딱히 할 일도 없었다. 전만영은 소양강에 낚시를 다녔고 박희순은 성당에 열심히 다녔다. 박희순이 다니던 죽림동 성당은 춘천의 대표 건축물이다. 1950년 9월 23일 춘천을 맹폭격하던 미 공군도 효자동의 민간인들은 죽였지만 엄연히 십자가 달린 성당 건물은 놔뒀다. 판잣집 살던 시절 박희순은 옆집 여자가 하도 개신교회에 나가자고 꼬시자 귀찮아서 “저는 가도 큰집에 가지 작은집에는 안 가요”라고 큰소리 쳤다. 그러고는 진짜 성당에 나가기 시작했다. 곧 전만영도 데려갔다. 지금도 나의 친가는 대부분 천주교도다.
1983년 10월 23일. 죽림동 성당에서 이영훈과 임봉빈, 박희순과 전만영이 나란히 앉았다. 그날 탄생한 부부가 팔년 뒤 낳은 아들이 나다. 내가 태어난 세상은 나의 조부모님이 태어나신 세상과 매우 달랐다. 1991년 대한민국은 문제가 많았지만 1920년대 일본제국보다는 훨씬 나았다. 나의 조부모님은 이십대 중반에 한국전쟁을 겪으셨다. 스물다섯살인 나는 지금 에스프레소를 마시면서 글이나 쓰고 앉아 있다.
이영훈과 박희순. 그들은 가장은 아니었지만 그래서 가사노동을 전담했고 군인은 아니었지만 그래서 더 멀리 피난가야 했다. 그들은 절대 ‘집사람’에 그치지 않았다. 집 밖에서 생계 유지의 선봉에 서는 일도 많았다. 애를 몇 명 낳을지도 결국 그들이 결정했고, 종교활동도 그들이 먼저 시작했다. 할머니들은 비록 남자가 주인인 사회에 살아야 했지만 당신들 삶의 항해에서 절대 키를 놓지 않았다.
나는 왜 이러한 세상에 태어났는가? 모든 역사가의 근본적 질문이다. 나도 그게 궁금해서 여지껏 역사를 공부해왔다. 그러다보니 영국 옥스퍼드까지 가서 18세기 서양정치철학사를 연구했다. 너무 멀리 갔나? 더 멀리 가기 전에 나는 할머니 역사부터 쓰고 싶었다. 나는 왜 이러한 세상에 태어났는가? 글쎄, 무한히 복잡 다단한 답변이 있을 수 있겠지만 쉽게 말하면 이렇다.
할머니 덕분이다.
(2015년 1월 12일 춘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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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unbumsun · 5 yea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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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봉암과 조지 오웰
조지 오웰은 현재 영미권 진보 지식인들 사이에서 특별한 위치를 갖고 있다. 2019년 “진보"라는 말의 의미는 모호하다. 20세기까지만 해도 진보란 곧 사회주의였다. 자본주의라는 현재를 넘어서 나아갈 분명한 미래가 있었다. 냉전이 끝나고, 사회주의 진영이 무너지면서 그 미래는 불투명해졌다. 역사가 끝났다고 할 수는 없어도 진보의 방향성이 불확실해진 것은 사실이었다. 그때 제시된 대안이 제3의 길이다.
사회민주주의, 진보적 자유주의 등 여러 이름으로 불리는 이 길은 엄밀히 말하면 대안이 아니라 절충안이다. 자본주의 체제에서 사회주의적인 개혁을 하자는 것이다. 제3의 길이 떠오르면서 마르크스와 레닌을 대신할 새로운 성인을 찾는 움직임이 있었다. 그때 재조명된 인물이 바로 에릭 아서 블레어, 필명으로 조지 오웰(1903-1950)이다.
평생을 트로츠키주의자로 살다가 9/11 이후 네오콘으로 전향한 크리스토퍼 히친스는 2002년 저작 [오웰이 중요한 이유]의 서문에서 프루스트를 인용했다.
“천재성은 ... 다른 사람들보다 우월한 교양과 지능의 씨앗이 아니라 그들을 변화하고 움직이는 능력에서 나온다. 전등으로 액체를 데우기 위해서는 가장 강력한 전구가 아니라 전류가 발광을 멈추고, 빛 대신 열을 내보내도록 바꿀 수 있는 전구가 필요하다. 하늘로 올라가려면 가장 강력한 모터가 아니라, 지구의 표면을 따라 계속 달리는 대신, 수평선과 수직선을 교차시켜서, 그 속도를 양력으로 바꿀 수 있는 모터가 필요하다. 비슷하게, 천재적인 작품을 남기는 사람은 가장 우아한 환경에 살고, 가장 화려한 대화를 하며, 가장 폭넓은 문화를 향유하는 자가 아니라, 자신만을 위해 살기를 멈추고, 자신의 인격을 일종의 거울로 만들어서, 자신의 삶이 아무리 사회적으로나 지적으로 보면 평범할지라도 그 거울에 비추어지게 만드는 힘이 있었던 자다. 천재성이란 거울의 반사력이 얼마나 강력하냐에 달린 것이지, 반사된 장면의 내재적 성질에 달린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조지 오웰의 천재성은 그의 인격이 만들어낸 거울에 있다. 오웰의 삶과 글은 1차대전 이후부터 냉전 초기까지의 서구 사회를 가장 강직하게 비추었다. “코끼리를 쏘다"는 대영제국의 민낯을, [파리와 런던의 밑바닥 생활]은 노동계급의 현실을 보여줬고, [동물농장]과 [1984]는 전체주의의 본질을 꿰뚫었다.
오웰은 소설가이지만, 근본적으로 정치가였다. “1936년 이후 내가 쓴 진지한 글의 모든 문장은 직간접적으로 전체주의에 반대하고 내가 아는 민주사회주의를 지지하는 것이었다.” 오웰의 작품이 오늘날까지 유효한 이유는 문장과 서사의 수려함 때문이 아니다. 그가 견지한 정치도덕적 입장이 지금 돌이켜 보았을 때 옳았다는 공감대 때문이다. 영국 제국주의와 자본주의를 비판하며 사회주의를 택했지만, 공산주의도 경멸했던 사민주의자. 그래서 당시에는 이쪽에서도 저쪽에서도 환영받지 못하는 낙동강 오리알이었지만, 이제는 일찍이 제3의 길을 걸었던 선구자로 추앙받는 것이다.
나는 영국에 조지 오웰이 있다면 한국에는 조봉암(1898-1959)이 있다고 생각한다. 물론 함규진 교수님이 밝혔듯이 조봉암을 사회민주주의자 내지 민주사회주의자로 볼지, 사회자유주의자 내지 자유사회주의자로 볼지는 이견의 여지가 있다. (네가지가 정확히 어떻게 다른지도 사실 애매하다.) 크게 봐서 제3의 길이었던 것은 맞다. 일제 때 공산주의자로 활동했던 조봉암은 해방 직후 전향하면서 절충안을 제시했다. 1946년 6월 “비공산정부를 세우자"는 성명서를 내면서 “노동계급의 독재나 자본계급의 전제를 반대한다”고 주장한 것이다. 공산당이 원하는 프롤레타리아 독재는 이제 부정하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자본주의의 횡포를 눈감을 수는 없다. 당시 미군정 보고서에 의하면 “조봉암씨는 좌익분자나 우익분자들이 다같이 정권을 장악하려고 날뛰고 있는데, 그들은 다같이 오류를 범하고 있는 것으로 믿는다고 말했다. 그는 새로 탄생될 정부는 모든 국민들의 합의 위에 세워져야 하며, 전국민의 5%밖에 대표하고 있지 않은 이들의 뜻대로 세워져서는 안될 것으로 믿는다고 말했다 … 전국민의 95%를 대변하는 신당을 창설할 작정이라고 말했다.” 그가 개척한 바로 이 제3의 길이야말로 오늘 우리가 대한민국 정부의 시작을 기억함에 있어서 일종의 도덕적 나침반이 될 수 있다.
청년 시절 조봉암과 오웰은 제국주의에 분노했다. 후자는 식민지 버마에서 근무하면서 영국 제국주의의 모순을 체감했고 그 뿌리를 자본주의에서 찾았다. 전자는 일본제국의 식민지 조선에서 같은 모순을 느꼈고 마찬가지로 원인을 자본주의로 봤다. 식민지 피지배 민족과 중심지 노동계급이 모두 하나의 구조 아래서 신음하고 있다고 결론지은 것이다. 그래서 둘 다 20대부터 억압받는 민족과 민중을 위해 살기로 결심했다. 오웰은 영국인임에도 불구하고 스페인 공화군에 자원했고, 깊은 총상을 입어 죽을 고비를 넘겼다. 같은 시기 조봉암은 중국과 몽고를 넘나들며 일제에 맞서다 붙잡혀 신의주 감옥에서 7년 넘게 복역했다.
물론 평행이론을 펼치려는 것은 아니다. 다른 점도 많았다. 오웰은 조봉암에 비해 일찍 공산주의와 담을 쌓았다. 스페인 내전을 통해 소련의 전체주의가 프랑코의 파시즘 만큼이나 위험하다는 것을 분명히 깨달았다. 그때부터 그는 일관되게 민주사회주의를 위해 싸웠다. 반면 조봉암은 2차 대전 이후에야 확실히 공산주의를 배척했다. 그가 전향한 계기가 정확히 무엇인지는 모르겠다. 박헌영에 대한 실망이었을 수도 있고, 미군정의 회유였을 수도 있으며, 새파랗게 어린 후배 김일성을 옹립한 소련에 대한 반감이었을 수도 있다.
오웰이 스페인 내전에서 겪은 것을 조봉암은 한국 내전에서 겪었다. 확고한 반공주의자로 거듭난 것이다. 조봉암은 6.25 때 한반도에서 일어난 일을 공산주의의 본질적 문제로 보았다.
“스탈린주의자들은 독재권을 찾기 위해서는 갖은 잔인한 짓을 예사로 하고 있는 것이며, 그것은 1924년 1월 레닌이 죽은 뒤에 스탈린은 그 자신이 자기의 많은 혁명동지들에게 대해서 무자비하게 피의 숙청을 단행함으로써 자기의 독재정권을 확립했고, 말렌코프는 베리아의 목숨을 빼앗고야 말았고, 이북의 괴뢰정권 김일성은 최근 박헌영 일파를 또한 같은 방법으로 죄를 뒤집어 씌워서 피의 제사를 지냈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이것이야말로 공산독재주의자들이 언제든지 쓰고있는 똑같은 수법임을 우리들이 알아야 할 것입니다.”
조봉암은 이후에도 사회주의적 개혁에 대한 의지를 꺾지 않았지만, 그의 사회주의는 오웰의 그것처럼 자국의 의회민주주의를 철저히 존중하는 성질의 것이었다. 그리고 기저에는 민족주의라고 부르기는 어려워도 이 땅의 민중에 대한 믿음에서 나오는 뜨거운 공동체 의식도 있었다. “우리들이 굳게 믿고 의심치 않는 것은 민중은 현명하다는 것이다. 이것은 인류역사의 진리로서 과거가 그러하였고 현재가 또한 그러하며 미래 역시 그러할 것이다.” 또한 노동문제 해결을 위해서는 “계급의 투쟁과 대립을 해소”시키고 “계급이 연합하여 상호 협조적으로” 접근해야 한다고 믿었다. 2차 대전 당시 오웰이 그랬던 것처럼 조봉암도 결국 계급 투쟁보다는 민족 단결을 우선시한 것이다.  
둘의 가장 큰 차이점은 죽음에 있었다. 오웰은 지병으로 죽었다. 조봉암은 독재자에 맞서다 법살당했다. 오웰의 선견지명은 사후에 금방 재조명되었다. 하지만 조봉암이 걸었던 제3의 길은 그를 죽음으로 몰았고 아직도 제대로 평가받지 못했다. 이승만에 대항해 평화통일론을 펼치다 간첩조작 사건으로 사형당한, 레드 컴플렉스 피해자들의 원조. 조봉암은 이 정도로만 기억되고 있다.
이것은 한국현대사를 지나치게 민족사관에 입각해 해석해서 그렇다. 조봉암의 사상에서 평화통일론은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그가 공산주의를 버리고 제3의 길을 택한 것은 물론 민족통일과 전혀 관련이 없지는 않지만 그것 때문만은 아니다. 당시 영국 노동당과 미국 민주당�� 행보도 영향을 주었을 것이고 51년 프랑크푸르트 선언도 큰 변수였을 것이다. 이승만과 김일성 사이에서 조봉암이 꿋꿋이 견지한 “진보"라는 이름. 그가 제시한 자유주의도 공산주의도 아닌 또 다른 진보의 의미를 온전히 이해하려면 “국사"의 프레임을 떠나 세계사적이고 비교사적인 방식으로 보아야 한다.
그래서 조봉암과 조지 오웰을 비교한다. 유라시아 대륙의 반대편 끝에서 동시대를 살았지만 이 둘이 택한 길은 결국 크게 다르지 않았다. 올해가 죽산 서거 60주년이다. 나는 지금 우리에게 <조봉암이 중요한 이유>를 생각하다 오웰의 천재성을 떠올릴 수 밖에 없었다. 조봉암의 천재성도 그의 교양이나 지능에 있지 않다. 그는 심지어 오웰 같은 문장가도 아니었다. 그러나 조봉암이라는 거울에 비친 그의 삶만큼 오늘날 한반도를 훤히 비추는 것도 없다. 문학이 아닌 현실 정치에서 투쟁하다 순교한 죽산의 거울이 어쩌면 오웰의 거울보다 더 강력하게 빛날 수도 있다. 21세기 한국에서 우리가 여전히 진보의 뜻을 찾는다면, 조봉암을 기억해야만 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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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unbumsun · 5 yea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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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일운동을 이끈 청년들의 신사상
“삼일운동” 하면 무엇이 떠오르나요? 유관순, 태극기, 만세운동, 일제의 탄압. 작년 삼일절, 문재인 대통령은 서대문 형무소에서 임시정부 이야기를 늘어놓았습니다. 안중근과 이봉창, 김구와 윤봉길이 등장했고, 항일무장독립투쟁의 고난을 상기했습니다. 독도와 위안부 문제를 짚었고, 마지막엔 김구의 소원인 문화강국을 내걸었습니다. 저는 역사학도로서 의아했습니다. 물론 하얼빈의 총성과 홍커우의 폭탄도 중요하지만, 그것이 1919년 3월 1일과 정확히 무슨 상관이 있을까요? 어째서 삼일운동의 진원이라고 할 수 있는 여운형과 김규식 등의 신한청년당이나, 실제로 선언문을 작성한 이광수와 최남선 등은 전혀 언급하지 않는 것일까요? 우리가 기억해야할 삼일운동의 하이라이트는 과연 유관순의 순국 밖에 없을까요?
저는 오늘 2019년 대한민국 청년의 시각으로 1919년 삼일운동을 이끈 청년들을 기억하려 합니다. 삼일운동은 청년운동이었습니다. 1880년대생부터 00년대생까지가 주축이 되어 기획하고, 행동했던 사건이었습니다. 그들의 사상은 기성 세대의 봉건적 사고와 확연히 달랐습니다. 구한말부터 선교사들을 통해 유입되고, 유학생들을 통해 수입된 근대 사상이 드디어 물꼬를 튼 것입니다. 서구 계몽주의에 뿌리를 둔, 다분히 국제주의적이고, 인류 보편적인 세계관이었습니다. 삼일운동은 그 시작부터 국제적이었습니다. 신한청년당은 상해에서 탄생했고, 대표단을 파리로 파견했으며, 이에 호응하여 도쿄 유학생들이 2.8 독립선언을, 천도교와 기독교가 3.1 독립선언을 주도한 것입니다. 당시까지 주류였던 유림이 이렇다 할 참여를 하지 않은 것에 주목해야 합니다. 이광수의 2.8 선언과 최남선의 3.1 선언에 담긴 언어는, 여전히 사서삼경에 익숙한 6, 70년대 생이 받아들이기에는 낯설고 불쾌했을 것입니다. 서재필 등 몇몇 선각자를 제외하고는 말입니다.
삼일운동 백주년인 올해는 이러한 시대적 배경을 피부로 느끼기에 아주 좋습니다. 저는 1991년생이라 이제 29살입니다. 최남선은 1890년생으로 기미독립선언문을 쓸 당시 30살이었고, 이광수는 92년생이라 28살이었습니다. 여운형은 86년생, 김규식은 81년생이라 여전히 “청년"이라 부를 수 있는 30대 중후반이었고, 유관순은 02년생 17살이었습니다. 박헌영, 허정숙 등 러시아 혁명의 세례를 받은 공산주의 청년들도 각각 00년, 02년 생으로 채 스무살도 되지 않은 때였습니다. 이들은 이전 세대와 달리 일찍이 해외 유학을 했거나, 외국인 선교사들이 세운 학교에서 신식 교육을 받았습니다. 그��서 기존의 유교적, 봉건적, 가부장적 질서와는 다른, 과학적, 민주공화주의적, 여성주의적 미래를 지향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삼일운동은 조선 청년들의 사상적 근대화에 힘입은 일대 정신 혁명이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저는 삼일운동을 이끈 청년들의 신사상이 크게 두 가지 의미에서 획기적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첫째는 국제법에 기반한 평화운동이었다는 점, 둘째는 비폭력 평화주의를 내세웠다는 점입니다. 이 두 가지 모두 19세기 말에야 세계사 무대에 본격적으로 등장한 개념이었습니다. 그것을 19세기 말 조선에 태어난 청년들이 온몸으로 습득하여, 전국민의 10%가 참여하는 거국적 운동으로 이끌었다는 것은 그 동시대성이 경이로울 뿐만 아니라, 세계사에도 특기할 만합니다. 과연 어떻게 된 일인지, 그 배경을 밝히고 의미를 논하는 것이 오늘 방담회의 목적 중 하나입니다.
​우선 삼일운동의 도화선인 신한청년당으로 가보겠습니다. 86년생 여운형은 몇몇 동지들과 1918년 상해에서 신한청년당을 세웁니다. 터키청년당 동지들에게 영감을 받은 이름이었습니다. 그때 1차 대전이 연합국의 승리로 끝나자 파리 강화회의로 이목이 집중됩니다. 여운형은 김규식을 파리로 보냅니다. 81년생 김규식은 어릴 적 언더우드 학당에서 공부했고, 서재필의 추천으로 미국 유학을 갔습니다. 프린스턴에서 석사까지 마치고 귀국했다가, 다시 중국과 몽고를 돌며 독립운동을 했습니다. 영어, 프랑스어, 독일어, 라틴어, 산스크리트어, 몽골어까지 능통한 인재였습니다. 그는 파리 강화회의에 희망을 걸었습니다. 미국 대통령 우드로 윌슨이 주창한 민족 자결주의에 공감했기 때문입니다. 모든 피지배 민족이 독립하여 스스로 운명을 결정해야 한다는 아주 이상주의적인 주장이었습니다. 윌슨은 국제법에 기반한 영구 평화를 꿈꿨고, 그 장치로 국제연맹을 제안했습니다. 비록 그 꿈은 야당인 공화당의 반대와 영국, 프랑스 등 다른 승전국들의 반발로 이뤄지지 못했지만, 국제연맹은 이후 국제연합, 즉 유엔의 모태가 됩니다.
​이때 김규식과 함께 파리에 간 선배가 있습니다. 바로 63년생 미국인 호머 헐버트입니다. 86년에 육영공원 교사로 처음 조선에 온 헐버트는 이후 배재학당에서 이승만, 주시경 등을 가르쳤고, 서재필과 함께 독립신문을 만들었습니다. 1905년 고종의 특사 자격으로 자국 대통령인 루즈벨트를 찾아가 을사조약의 부당함을 알렸고, 조미통상수호조약에 근거해 미국이 조선을 도와야 한다고 호소했습니다. 그것이 수포로 돌아가자, 1907년 헐버트는 또 다시 고종의 부탁으로 이위종, 이준, 이상설과 함께 헤이그 만국 평화회의에 참석하려 합니다. 그러나 이 역시 일제의 방해로 실패합니다. 베르사유에서 문전박대를 당한 것이 헐버트에게는 처음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1905년과 1907년, 1919년까지 헐버트의 논리는 일관되었습니다. 일제의 조선 침략은 국제법에 어긋나는 행위이니, 미국을 비롯한 열강들이 인도주의의 이름으로 개입하여 독립을 보장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유엔의 도움으로 국가를 보전한 우리에게 지금은 너무도 익숙하지만, 당시로서는 새로운 논리였습니다.
​우리는 이 논리에 주목해야 합니다. 바로 영구평화론입니다. 서양에서는 토마스 페인이나 임마누엘 칸트 같은 계몽주의 사상가들이 처음 말하고, 조선에서는 안중근이 <동양평화론>에서 펼친 이 주장은 근대 전쟁의 잔학성에 대한 반작용이었습니다. 고대부터 전근대까지 인류 역사에서 전쟁은 자연스러운 삶의 일부였습니다. 평화란 전쟁과 전쟁 사이 준비 기간일 뿐이었습니다. 그러나 근대에 이르러 인류는 전쟁의 득보다 실이 크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특히 독가스와 기관총을 비롯한 대량살상무기가 도입된 세계 1차 대전은 경종을 울렸습니다. 더 이상의 전쟁은 아니된다, 국제법에 기반한 항구적 평화체제를 구축해야 한다, 는 자각이 있었습니다.
​헐버트는 국제법에 입각해 한국을 변호했습니다. 워싱턴에서도, 헤이그에서도, 파리에서도 번번히 무시당했지만, 그 신념은 한결같았습니다. 힘의 논리 앞에서 법과 도의를 외쳤다는 점에서 헐버트는 윌슨과 같았고, 삼일운동을 이끈 조선 청년들과도 한마음이었습니다. 우리가 삼일운동의 시작을 신한청년당의 파리 강화회의 파견으로 볼 때, 그것은 반드시 헤이그 평화회의의 연장선상에서 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이 모두는 헐버트와 서재필과 김규식 등 조선 개화 청년들 사이에 퍼져 있던 국제주의적 평화운동의 맥락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이광수의 2.8 독립선언문 논지는 간단합니다. “한일합병은 조선민족의 자유의지에 따른 것이 아니고, 동양의 평화를 헤치기 때문에 무효이다. 윌슨의 민족자결주의를 우리에게도 적용해달라.” 최남선의 3.1 독립선언문은 조금 더 나아갑니다. “아아 신천지가 안전에 전개되도다. 위력의 시대가 거하고 도의의 시대가 래하도다. 과거 전세기에 연마, 장양된 인도적 정신이 바야흐로 신문명의 서광을 인류의 역사에 투사하기 시하도다. 신춘이 세계에 래하야 만물의 회소를 최촉하는도다.” 위력의 시대를 보내고 맞이하는 도의의 시대. 바로 국제법과 인도주의에 기반한 평화체제입니다. 윌슨에게 보내는 편지와도 같은 이광수와 최남선의 선언문은 그들의 사상과 언어가 얼마나 서구 계몽주의의 영향을 받았는지 보여줍니다. 기미독립선언문은, 모든 독립선언문이 그렇듯이, 1776년 미국 독립선언문의 후예입니다. 최남선의 사상은 단군의 홍익인간 뜻이나 정약용의 실학사상보다도 토마스 제퍼슨의 독립 정신에 가깝습니다. 육당은 아주 계몽주의적인 심상으로 선언문을 마칩니다. “다만, 전두의 광명으로 맥진할 따름이다.” 어둠을 벗어나 빛을 향해 돌진한다. 서양의 진보주의적 역사관을 열렬히 끌어안은 조선 청년의 다짐입니다.
​이처럼 삼일운동을 이끈 청년들은 계몽주의적 사상으로 국제법 질서를 옹호할 만큼, 이미 세계시민의 관점에서 역사를 보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여기까지는 사실 다른 나라에서도 쉽게 찾아볼 수 있는 내용입니다. 20세기 초 식민지배를 받았던 아시아, 중동, 아프리카의 많은 나라들이 이와 같은 논리로 독립을 주장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삼일운동은 그 방법론에서도 아주 독보적이고 선구적이었습니다. 비폭력 평화주의를 실천했기 때문입니다.
​비폭력 평화주의 내지 시민 불복종 운동의 역사는 국제법에 기반한 평화운동의 역사 만큼이나 짧습니다. 19세기 중반 철학자 헨리 데이빗 소로우가 미국의 멕시코 침략과 노예 제도에 반대하여 납세를 거부한 것이 시민 불복종의 시작입니다. 그 작동법은 이렇습니다. 정부의 불의에 저항함에 있어 폭력을 쓰거나 혁명을 일으키지 않고, 평화적으로 반대 의사를 밝힌다. 그렇게 확보한 도덕적 정당성을 세계 시민에게 알려 연대를 꾀한다. 이를 통해 정부를 압박하여 원하는 개혁을 도출한다. 이것이야말로 봉건 사회에서는 꿈도 꿀 수 없는, 철저히 근대적이며 자유주의적인 운동 방식입니다. 소로우가 착안한 이 개념이 톨스토이를 통해 간디에게, 간디를 통해 마틴 루터 킹에게 전수되었다는 것이 비폭력 평화운동사의 줄거리입니다.
그런데 인도 독립운동이 간디의 비폭력, 불복종 철학인 ‘사티아그라하'를 본격 채택한 것은 1920년대입니다. 그리고 그곳에서도 전국민의 10%가 넘게 동시다발적으로 참여한 적은 없습니다. 1960년대 마틴 루터 킹의 민권 운동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렇듯 삼일운동이 시기로나 규모로 보았을 때 세계사에서 중요하게 다뤄지는 것이 마땅하지만, 여태껏 그렇지 못했습니다. “인도인이 이토록 평화적인 자세로 독립을 원한다"라는 메시지를 세계에 전한 게 간디의 독립운동이라면 그 똑같은 이야기를 더 먼저, 더 크게 한 것이 삼일운동 아니겠습니까? 삼일운동이 제대로 된 입지를 확보하지 못한 이유는 일단 서양 중심적인 역사관이 클 것이며, 간디나 마틴 루터 킹처럼 대표적인 지도자를 꼽기 힘들다는 점도 한 몫 했을 것입니다. 전자는 고쳐야 하겠지만, 후자는 그 자체로 삼일운동의 민주성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더 부각시켜야 합니다.
삼일운동이 어떻게 해서 이토록 선진적인 시위 방법을 택하게 되었는지 저는 잘 모릅니다. 당시 청년들이 소로우나 톨스토이의 사상에 감화된 것인지, 아니면 도저히 일제에 폭력으로 대항할 엄두를 못낸 것인지, 결론짓기 어렵습니다. 다만 당시 군중들이 미국과 프랑스 공사관을 향해 행진했다는 사실에서 어렴풋이 유추할 수 있습니다. 앞서 말한 국제법 질서 위에서 열강의 여론을 우호적으로 끌어오기 위해 이러한 방법을 취한 것입니다. 비폭력적인 시민 불복종의 모습을 보여야 도덕적 정당성을 얻을 수 있고, 열강들로 하여금 일본을 압박하게 할 수 있다는 계산이었습니다. 삼일운동은 적어도 그 방법론에 있어서는 전봉준보다 소로우에 가까웠던 것입니다.
2019년 오늘, 저는 삼일운동의 비폭력 평화주의를 기억하면서 촛불혁명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문재인 대통령은 삼일운동의 정신이 곧 촛불이라고 말했습니다. 저도 그리 생각합니다. 백만이 넘는 국민들이 거리로 나와 비폭력적인 방식으로 혁명을 꾀하는, 이토록 성숙한 민주주의를 가진 나라는 많지 않습니다. 그러한 대한민국 백년의 시작이 삼일운동인 것도 분명한 사실입니다.
하지만 저는 삼일운동의 정신 만큼은 결국 청년들이 정의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위에서 보았듯이 삼일운동을 위대하게 만든 것은 당시 조선에 처음 등장한, 80에서 00년대생 청년들의 국제주의적 안목이었습니다. 유교적 세계관에서 자란 윗세대에게 그들은 외계인과 같은 존재였을 것입니다. 이러한 세대 차이는 100년 뒤 지금, 또 다른 양상으로 재현되고 있습니다. 현재 대한민국을 지배하는 60년대생, 속칭 386 세대는 청년들을 잘 이해하지 못합니다. <90년생이 온다>라는 책이 베스트 셀러에 오를 정도로 밀레니얼 세대를 두려워 합니다. 386이 가난과 독재를 딛고 일어섰다면, 밀레니얼은 부유하고 민주적이고 세계화된 대한민국에서 자랐기 때문입니다. 청년들은 “헬조선”이다, “꼰대"다, “빻았다", 하는 말들로 기성세대를 공격합니다. 그 간극이 조금은 걱정스럽습니다.
정부는 삼일절 백주년을 맞아 항일의식을 고취하여 남북 화합을 꾀하고, 김구로 대표되는 임시정부의 정통성을 계승하려 합니다. 그러는 와중에 삼일운동의 키워드는 민족, 임정, 나아가 항일무장투쟁으로 인식되고 있습니다. 저는 오늘 국제주의와 비폭력 평화주의를 또 다른 키워드로 제시합니다. 삼일운동을 이끈 청년들의 신사상에 주목할 때, 비로소 삼일운동의 세계사적 의미와 대한민국의 사상적 뿌리도 온전히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 참석하신 다른 분들의 생각도 궁금합니다. 이 자리를 계기로 삼일운동의 청년정신이 더 널리 논의되고 알려졌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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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unbumsun · 6 yea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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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리 질러∼ 이게 바로 ‘조선 록’
밴드 ‘전범선과 양반들’의 신작을 온전히 이해하려면 다음 작품들을 함께 음미하는 게 좋다. 봉산탈춤 중 ‘목중춤’, 나도향의 ‘물레방아’, 김성동의 ‘만다라’, 정호승의 ‘서울의 예수’, 민요 ‘천안삼거리’와 나훈아의 ‘쾌지나 칭칭나네’, 신민요 ‘태평가’, 화가 이쾌대의 자화상…. 2014년부터 서울 홍익대 인근에서는 상투를 튼 청년���이 풍물 북을 치며 록을 연주한다는 괴이한 풍문이 들렸다. ‘조선 록(rock)’의 창시자라는 세간의 평답게 노래 제목도 이랬다. ‘이리 오너라’ ‘보쌈’ ‘칠석’ ‘구운몽’…. 최근 3집을 낸 멤버들을 만났다. 통일부 주최 ‘유니뮤직레이스’ 우승으로 포상 외박을 나온 리더 전범선(27·사진)은 까까머리에 군복 차림이었다. 2018년의 한국적 록이 무엇이냐 묻고자 했다. ○ ‘조선 땅에 태어나 쌍놈이긴 싫어/벼슬길을 따라 공자왈…’(‘뱅뱅사거리’ 중) ‘하오체’와 조선 풍류를 결합한 ‘양반 록 사운드’란 대체 어디서 나온 것일까. 전범선은 “이 모든 게 그저 자연스러운 일”이라고 받았다. “도어스, 레너드 코언, 파더 존 미스티…. 고금의 음악가가 셰익스피어부터 조지 오웰까지 다양한 옛것을 노래에 녹였습니다. 그리할진대 제가 구운몽이나 물레방아 얘기를 하는 게 그리 주목할 것인지를 저는 모르겠습니다.” 전범선은 역사학도다. 민족사관고교를 졸업하고 미국 다트머스대 학사, 영국 옥스퍼드대 석사를 거치며 미국 프랑스 영국의 혁명사를 팠다. 고교 대취타 동아리에서 용고(龍鼓)를 두드렸고 ‘양반들’ 이전엔 밴드 ‘놈’으로 활동했다. “유학 후 2집 ‘혁명가’(2016년)를 내고 전봉준을 오마주했습니다. ‘엎어보자’는 메시지를 던졌는데 한국에서 진짜 ‘혁명’이 일어납디다.” 전범선은 그해 말 카투사로 입대했다. ‘유니뮤직레이스’ 우승 곡 ‘전선을 간다’는 경기 동두천의 부대에서 15분 만에 쓴 곡이다. “비 맞은 소요산을 보는데 ‘저 산 뒤에도 저처럼 산을 바라보는 장병 친구들이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멜로디를 기억했다가 휴가 때 출품했는데 우승까지 차지할 줄은 몰랐다고 했다. ○ ‘나는 김가 아님 박가 아님 최가 아님 이가’(‘나그네’ 중) ‘혁명가’의 화자가 전봉준이라면 3집 ‘방랑가’의 주인공은 파계승이라 했다. 입대 전 전범선이 지은 노래들을 ‘양반들’이 마무리해 냈다. “산 아래서 머리 밀고 사는 제가 곧 파계승 아니겠습니까.” 3집 타이틀곡은 천안삼거리를 변형한 ‘뱅뱅사거리’. ‘천안삼거리 흥∼흥∼’ 하던 양반은 서울 서초구에서 ‘뱅뱅사거리 뱅∼뱅’ 한다. “‘혁명가’가 직선이라면 방랑가는 뱅뱅 도는 곡선이지요.” 노래 ‘만다라’에서는 ‘옴마니 반메홈’을, ‘서울의 예수’에선 ‘알렐루야’를 읊조린다. “예수, 마호메트, 석가모니 모두 방랑을 합니다. 깨달음의 길입니다.” 악곡 속에선 블랙 사바스, 옥슨80과 송골매, 영국 모던 록이 교차한다. 때리고 부수다 음유한다. ‘양반들’ 음악의 매력이다. ‘이쾌대’에는 전범선이 할머니의 장례식장에서 녹음해 둔 천주교식 연도(煉禱) 소리를 담았다. “조선 땅에서 예술가의 길을 걷는 것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전범선은 요즘 ‘대한미국’이란 책을 쓰고 있다. 대한민국과 미국의 합성어로, 한국 근현대사를 서구와의 관계에서 재조명한 내용이라고 했다. “제대하면 밴드 활동을 이어가야죠. 판을 벌여가야죠. (우리 음악은) 마당놀이니까 판을 만들어야 또 새로운 연기를 하지 않겠습니까.” 임희윤 기자 [email protected] 원문보기: http://news.donga.com/3/all/20180123/88312587/1#csidx18d366735ff3931b05307ac886258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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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unbumsun · 6 yea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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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물 해방
1973년 4월 5일 피터 싱어 씀 
“동물해방물결” 발족을 맞아 전범선 발췌 및 옮김
1.
우리는 흑인 해방, 게이 해방 및 기타 여러 운동들에는 익숙하다. 혹자는 여성 해방과 함께 우리가 이 길의 끝에 왔다고 생각했다. 심지어 인종 차별로부터 자유롭다고 오랫동안 스스로 자부해온 자유주의 집단들 속에서도, 성차별이야말로 보편적으로 인정되고 변명없이 행해지는 마지막 차별 형태라고 말해왔다. 그러나 언제나 “마지막 남은 차별 형태”를 논하는 것은 조심해야 한다. 그동안 해방 운동들로부터 배운 것이 있다면, 우리가 누군가를 차별하는 방식을 깨닫는 것이, 누군가 그것을 강력히 지적해주기 전까지는 얼마나 어려운가, 이다. 해방 운동은 우리의 도덕적 시야 확장을 요함으로써, 여태껏 자연스럽고 불가피하게 여겼던 관행들을 더 이상 견딜 수 없어 보이게 만드는 것이다.
...
아마 독자는 회의적일 것이다. “동물 해방”은 진지한 목표라기보다 해방 운동들의 패러디처럼 들린다. 혹자는 이렇게 생각할 수 있다:
우리는 흑인 및 여성이 실제로 백인 및 남성과 동등하기 때문에 흑인 및 여성의 평등을 지지한다. 지능과 능력 면에서, 지도력, 합리성 면에서 동등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인간과 비인간은 이러한 면에서 당연히 동등하지 않다. 정의란 동등한 것들을 공평하게 대할 것만을 요하기 때문에, 인간과 비인간의 차별 대우는 부당할 수 없다.
이는 끌리는 답변이지만, 위험한 답변이기도 하다. 이는 비인종차별주의자와 비성차별주의자로 하여금 흑인 및 여성이 실제로 백인 및 남성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똑같은 지능과 능력 등을 가졌다는 독단적 입장에 서도록 한다. 이것이 사실일 가능성도 크다. 분명 이러한 면들에서의 인종적, 성적 차이들이 유전적 원인을 갖는다는 것을 증명하려는 시도들은 확정적이지 못했다. 그러나 우리는 정말로 평등을 위한 주장을 인종과 성별 간에 이러한 종류의 유전적 차이가 없다는 가정에 걸고 싶은가? 틀림없이, 그러한 유전적 차이의 증거를 찾았다고 주장하는 이들에 대한 올바른 반응은, 그 반대 증거가 무엇이건 간에, 차이가 없다는 입장을 고수하는 것이 아니다. 반대로 평등에 대한 주장이 IQ에 의존하지 않다는 것을 분명히 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인간은, 개인으로서, 지능 및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거의 모든 능력에 있어서 명백히 다르기 때문에, 인간 평등을 논하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일 것이다. 우월한 지능을 갖는 것이 한 인간으로 하여금 다른 인간을 착취할 수 있는 권리를 주지 않는다면, 어찌하여 이것이 인간들로 하여금 비인간들을 착취할 권리를 주겠는가?
제레미 벤담은 평등의 본질적인 기반을 다음과 같은 자신의 유명한 공식으로 표현했다. “각각 하나로 치고 아무 것도 여럿으로 치지 않는다.” 다른 말로, 이익을 갖는 모든 존재의 이익을 고려해야 하고, 다른 모든 존재의 비슷한 이익과 똑같이 대우해야 한다. 벤담 이전과 이후의 도덕 철학자들도 같은 주장을 다른 방식으로 해왔다. 다른 존재들을 위한 우리의 관심은 그들이 특정 성질을 가졌는가에 달려서는 아니된다. 그 관심이 정확히 무엇을 수반하는지는, 물론, 이러한 특성에 따라 다를 테지만 말이다.
벤담은 인종 평등 주장의 논리가 인간 평등에서 멈추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이렇게 적었다:
“폭정의 손에 의해서가 아니고서야 절대 보류될 수 없었던 그 권리들을 나머지 동물들도 얻는 날이 올 수도 있다. 프랑스인들은 이미 피부가 검다는 것이 한 인간이 다른 이의 변덕에 의해 고통을 당하고도 아무런 구제를 받지 못하도록 내버려져야 할 이유가 아님을 깨달았다. 언젠가는 다리 개수, 털의 양, 엉치뼈 말단 등이 고통을 느끼는 존재로 하여금 그와 같은 운명에 처하도록 내버려둘 이유가 되기에 마찬가지로 부족함이 인정될 날이 올 수 있다. 그렇다면 과연 무엇이 넘을 수 없는 선을 그을 것인가? 이성 능력인가, 어쩌면 담화 능력인가? 그러나 다 자란 말이나 개가 하루 내지 일주일, 심지어 한 달 된 아기보다 더 합리적이며 대화가능한 동물이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고 치자. 그게 소용이 있을까? 문제는 그들이 사고를 할 수 있는가? 말을 할 수 있는가?가 아니다. 고통을 느낄 수 있는가?다.”
벤담이 분명 옳았다. 만약 어떤 존재가 고통을 느낀다면, 그 고통을 고려하고, (대략적인 비교가 가능하다면) 다른 존재들의 비슷한 고통과 동등하게 간주하는 것을 거부한다는 것은 도덕적으로 정당화할 수 없다.
그렇다면 문제는 오로지 이것이다. 인간이 아닌 동물들도 고통을 느끼는가? 대부분 사람들은 고양이와 개 같은 동물들도 고통을 느낄 수 있고 실제로 느낀다고 주저없이 동의하며, 이것은 이러한 동물들에 대한 불필요한 학대를 금지하는 법들이 가정하는 바이기도 하다. 개인적으로, 나는 이에 대해 아무런 의심도 없으며 몇몇 사람들이 갖고 있는 듯한 의심을 진지하게 받아들이기도 힘들다 …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것이 워낙 근본적인 사항이기 때문에, 우리가 다른 동물들도 고통을 느낀다고 여기는 데 어떠한 근거가 있는지 따져볼 가치가 있다.
우선 인간 개인이 다른 인간들도 고통을 느낀다고 가정하는 데에는 어떤 근거가 있는지 따져보는 것이 가장 좋다. 고통이란 일종의 의식 상태, “정신적 사건”이기 때문에 절대로 직접 관찰될 수 없다. 어떠한 관찰도, 몸부림 또는 비명과 같은 행동적 신호들 또는 생리학적, 신경학적 기록들도 고통 자체의 관찰은 아니다. 고통은 느끼는 것이고, 우리는 다른 이들이 고통을 느낀다는 것을 다양한 외적 표시들을 통해서 추론할 수 밖에 없다. 애초에 오직 철학자들만이 다른 인간들도 고통을 느끼는지에 대해 의심을 갖는다는 사실은 우리가 인간의 경우에는 이러한 추론을 합당하게 여김을 보여준다.
똑같은 추론이 다른 동물들한테는 합당하지 않을 이유가 있는가? 다른 인간들 속의 고통을 추론하게 하는 거의 모든 외적 신호들을 다른 종들, 특히 포유류 및 조류와 같은 “고등” 동물들에게도 볼 수 있다. 행동적 신호들—몸부림, 캥캥 짖는 소리, 또는 다른 형태의 울음 소리, 고통을 피하려는 시도, 기타 등등—이 존재한다. 우리는 또 연관된 여러 면들에서 이러한 동물들이 생물학적으로 유사하다는 것, 우리와 비슷한 신경 체계를 갖고 그것이 우리와 같은 방식으로 작동한다는 것 또한 알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가 다른 포유류 및 조류가 고통을 느낀다고 믿을만한 근거들은 우리가 다른 인간들이 고통을 느낀다고 믿는 근거과 매우 유사하다. 남은 것은 이러한 유사성이 진화론적인 단계에서 어디까지 내려가는가 따져보는 것이다. 이는 당연히 인간으로부터 멀어질 수록 희미해진다. 더 정확하려면 우리가 다른 생명체들에 관해 아는 모든 것에 대한 심도 있는 검토가 필요할 것이다. 어류, 파충류 및 기타 척추동물과는 이 유사성이 여전히 강해보이고, 조개와 같은 연체 동물과는 훨씬 약해보인다. 곤충은 더 어렵고, 우리의 현재 지식 상태로는 그들이 고통을 느끼는지에 대해 불가지론적이어야 할 수도 있다.
요점은 이 문제에 관해서 진정으로 객관적인 비판론자는 거의 없다는 것이다. 매일 도축된 비인간들의 살점을 먹는 사람들은 그들이 잘못을 하고 있다는 것을 믿기 어려워한다. 그리고 먹을 수 있는 다른 게 무엇이 있는지 상상하는 것도 어려워한다. 따라서 비인간을 도덕의 울타리 밖에 두지 않는 이들은 더 이상의 논쟁이 무의미해보이는 단계, 상대방의 위선을 비난하고 우리의 관습 및 그 관습을 옹호하는 방식에 관한 일종의 사회학적 설명을 찾는 단계에 도달하기 마련이다 … 반대로, 그 주장에 설득되지 않고, 그저 자신의 식습관 및 자신이 이상하게 여겨지는 것에 대한 공포를 합리화하고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못하는 자들에게는 이러한 사회학적 설명이 모욕적으로 거만하게 보일 수 밖에 없다.
2.
종차별주의 논리는 인간의 이익을 위해 비인간에게 실험하는 관행에서 가장 분명히 드러난다. 왜냐하면 이 문제는 비인간이 인간과 너무 달라서 그들이 고통을 느끼는지 전혀 알 수 없다는 주장으로 은폐되는 경우가 거의 없기 때문이다. 생체 해부 옹호자는 인간과 다른 동물 간의 유사성을 강조함으로써 전자에게 후자에 대한 실험의 유용성을 정당화해야 하기 때문에 이 주장을 쓸 수 없다. 쥐들로 하여금 배고픔과 전기 충격 사이에서 선택하도록 만들어서 쥐들에게 궤양이 생기는지 (생긴다) 알아보려는 실험자는 쥐가 인간과 매우 유사한 신경 체계를 갖고 있으며, 아마 유사한 방식으로 전기 충격을 느낀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그리하는 것이다.
바로 지금 이러한 실험들이 이 나라 전역의 대학 캠퍼스들 위에서 벌어지고 있지만, 내가 아는 바로는, 학생 운동으로부터 일말의 저항도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는 것은 이러한 관행이 얼마나 용인되고 있는지에 대한 중요한 증거다. 학생들은 자신의 대학이 인종이나 성별에 따라 차별해서는 아니되며, 군대나 대기업의 목적에 봉사해서는 아니된다고 정당하게 우려해왔다. 그러나 종차별주의는 그대로 지속되며, 많은 학생들이 이에 참여한다. 처음에는 조금 양심의 가책이 있을 수 있지만, 모든 이가 정상으로, 심지어는 과정의 필수적인 부분으로 여기기 때문에, 학생은 곧 무감각해지고, 이전의 느낌을 “감정 따위”로 치부하면서, 동물들을 우리가 마땅히 고려해주어야 할 이익을 갖는, 느끼는 존재가 아닌 통계 수치로 여기게 된다.
생체 해부에 관한 논쟁은 여태껏 절대론적인 말들로 이뤄졌기 때문에 요점에서 벗어났다. 폐지론자는 하나의 동물에 실험함으로써 살릴 수 있는 수천명을 죽게 내버려둘 준비가 되어있는가? 이렇듯 순전히 가정적인 질문에 답하는 방법은 또 다른 가정을 제시하는 것이다. 실험자는 만약 그것이 많은 목숨을 살릴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면 육개월 미만의 인간 고아에게 실험할 준비가 되어있는가? (나는 부모 감정의 복잡성을 피하기 위해 “고아”라고 한정한다. 그러나 그럼으로써 나는 실험자에게 지나치게 공평하게 구는 것이다. 비인간 실험 대상들은 고아가 아니기 때문이다.) 이 질문에 대한 부정적 대답은 비인간을 이용하는 실험자의 자세가 단순한 차별임을 나타낸다. 유인원, 고양이, 쥐 등 다른 포유류의 성체들은 인간 유아에 비해 자신에게 무슨 일이 생기는지 더 의식하며, 더 자발적이고, 우리가 아는 바에 의하면, 비슷한 정도로 고통에 민감하다. 인간 유아가 갖는 특성 중 포유류 성체가 비슷하거나 그 이상으로 갖지 않는 것은 없다.
실험자는, 즉, 같거나 더 낮은 정도의 감각, 의식, 자발성을 가진 인간을 이용하는 게 정당하지 않다고 생각되는 목적을 위해 비인간을 이용해 실험할 때마다 자기 종 중심적인 편견을 보이는 것이다. 이러한 실험들의 결과에 익숙한 사람은 이 편견이 제거되었을 경우 이행될 실험의 숫자가 전무 또는 그에 가까울 것이라는 점에 한치의 의심도 있을 수 없다.
3.
공장식 축산 농장의 동물들은 가장 문자 그대로의 해방을 요한다. 식육용 송아지들은 5 피트 x 2 피트 우리에 갇혀 지낸다. 그들은 주로 사개월 정도 되었을 때, 최소 한달 이상은 너무 커서 우리 안에서 움직일 수 없게 되었을 때 도축된다. 훨씬 긴 기간 동안 이에 비해서만 더 큰 우리에 갇혀 지내는 집약적 소고기 무리들이 소고기 생산에서 증가하는 비율을 차지한다. 암퇘지들은 주로 임신되었을 때 비슷하게 감금당하는데, 이는 번식력을 키우는 인공 방식 때문에 대부분의 시간일 수 있다. 이런 식으로 감금당한 동물들은 운동으로 음식을 낭비하지 않으며, 맛없는 근육을 발달시키지도 않는다.
공장식 축산품을 구매함으로써 이를 지지하는 사람들 중 그것이 어떻게 생산되는지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이에 대해 들어보았지만, 스스로 불편해질까봐 두려워 확인 해보기를 꺼리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비종차별주의자에게 전형적인 소비자의 무지, 진실 회피, 진정 악한 일이 허용될 리가 없다는 애매한 믿음의 조합은 죽음의 수용소에 대한 “착한 독일인들”의 태도와 유사해 보인다.
공장식 축산이 고통을 느끼는 존재들에 대한 부당한 수준의 착취를 수반한다는 것에는 동의하지만, “인도적”으로만 한다면 식용으로 동물을 키우는 것에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말하고 싶은 독자들이 많을 것이다. 이 사람들이 말하는 것은, 사실상, 우리는 동물들에게 고통을 주어서는 아니되지만, 그들을 죽이는 것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것이다.
이 관점에 대해서는 두 가지 답변이 가능하다. 하나는 이 태도들의 조합이 불합리함을 보이는 것이다 … 안락사가 논란거리인 이유는 오직 우리가 삶에 어떠한 가치를 부여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그러지 않았다면, 약간의 고통도 안락사를 정당화할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모든 동물의 목숨을 빼앗아야 할 의무가 있다고 믿지 않는다면, 우리는 동물의 삶에 우리가 어떠한 가치를 부여한다는 것을 인정해야만 한다.
두번째 답변은 우리가 인간이 단순히 고기를 좋아하는 입맛을 충족시키기 위해 비인간을 죽여도 된다고 생각하는 한, 우리는 여전히 비인간을 그 자체로 목적이 아닌 수단으로 생각하고 있다는 것이다. 공장식 축산은 이 개념에 대한 기술의 적용일 뿐이다. 전통적인 방식들조차 거세, 어미와 새끼의 분리, 무리의 해체, 낙인 또는 귀 뚫기, 그리고 당연히 도살장으로의 운송과 피 냄새를 맡고 위험을 감지했을 때 느끼는 최후의 공포를 수반한다. 동물들이 고통 없이 살고 죽도록 기르고자 노력한다면, 오늘날 육류 업계의 크기를 유지하기란 완전 불가능할 것이다. 고기는 가진 자의 전유물이 될 것이다.
음식과 실험 목적을 위한 다른 종들의 착취에 비해서 다른 문제들은 부차적인 사항들이기 때문에 나는 다루지 않았다 … 이 글은 모든 인간으로 하여금 자신이 비인간에게 갖는 태도가 인종차별주의 또는 성차별주의 만큼 문제 있는 편견의 형태임을 인정하도록 하는 도전이다. 이는 우리에게 채식주의자가 될 것을 요구하기 때문에 단순한 태도의 변화가 아닌, 우리 삶의 방식의 변화를 요한다.
이런 종류의 순수한 도덕적 주장이 성공할 수 있을까? 분명 가능성은 적다 … 우리가 동물 착취를 멈추면 우리가 더 건강해질 것이라, 삶을 더 즐길 것이라 말할 수 없다. 동물 해방은 다른 어떤 해방 운동보다도 인류 입장에서 더 큰 이타주의를 요구할 것이다. 동물은 스스로 해방을 요구하거나, 투표, 시위, 폭탄 등으로 착취에 저항하지도 못하기 때문이다. 인간에게 이토록 진정한 이타주의가 가능할까? 누가 아는가?
그러나 만약 이 글이 상당한 효과를 갖는다면, 이는 인간이 그 속에 잔인함과 이기심 이상의 잠재력을 가졌다고 믿었던 모든 이들의 승리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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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unbumsun · 6 yea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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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hat is a KATUSA?
The following essay was written for the “Equal Opportunities” training at my battal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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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hat is a KATUSA?
A KATUSA, or a Korean Augmentation to the United States Army, is a very peculiar entity. He is neither fully a US nor a ROK soldier. He lives and works with the US Army, in American uniform, but is paid almost nothing. He technically belongs to the ROK Army, and wears a Korean flag, but his daily life hardly resembles that of an average ROK soldier. As such, he is alienated from both sides. Both consider him spoiled: Americans because this conscript seems less motivated than his professional counterparts, Koreans because this lottery winner has it better than the rest. Simultaneously owned and disowned by both organizations, a KATUSA is a middleman without parallel in the US Army, or for that matter, in the world.
There is one historical precedent, however, that helps understand the lot of a KATUSA. A sepoy was an Indian soldier working under British orders. Taken mostly from the privileged class of the Indian society, he was both envied and disdained by his compatriots. The British originally raised sepoys to augment the small number of their regulars in India. To be sure, the parallel should not be overstretched. The British Indian Army ended up being more than 90 percent sepoys, whereas the United States Forces Korea is only about 10 percent KATUSA. And nothing like the Sepoy Mutiny of 1857 seems imminent in Camp Casey. Still, the likeness is undeniable. The KATUSA, though seemingly peculiar now, is easily understood as an example of the West’s long tradition of outsourcing native soldiers for its military presence in the East.
The continuity gets more apparent if you analyze the origin of the KATUSA system. When the Korean War broke out in 1950, the US Army did not have enough soldiers on the peninsula. Nor could it bring in too many because of the half-hearted public support for the war at home. So Ambassador John Muccio came up with the idea of recruiting Korean bodies to fill up the American ranks, which General MacArthur only reluctantly accepted. President Syngman Rhee, having basically returned the sovereignty of the nascent republic to the US military, within less than two years after it was granted by the latter, acceded to the proposal. And all of this was done orally—even to this day, there is no legal basis for the existence of the KATUSA system.
For it was meant to be a temporary measure. But it outlasted the war since both the US and ROK found it convenient. To the former, it offered extremely cheap labor, already trained in the language and geography of the nation. The latter had nothing to lose as it had an endless supply of forced workers through the conscription system. Sixty years, and the arrangement has not changed.
What did change was the quality of the KATUSA workforce. The early KATUSAs, compared to their American counterparts, were poorly educated, with little to no English proficiency, not to mention malnourished. Towards the turn of the millennium, however, the overwhelming majority of the KATUSAs were from the top universities in Korea, which had become one of the wealthiest countries in the world. This created two problems: First, it seemed socially unjust to give only the well-educated, mostly rich, candidates the privilege to live in the US Army environment, which was obviously more comfortable than the regular ROK service. Second, the ROK leadership was concerned that some of their best resources were being taken by the US Army. Hence the birth of the lottery system. Now, you only need a minimum score on a standardized English test to enter the competition. And if you are the lucky one out of ten, you get to be a KATUSA.
So much for what it means to be a KATUSA. What does he actually do then? (And I keep using ‘he’ because only males are obligated to serve in Korea.) The common understanding is that a KATUSA is a translator. This is true, but only insofar as all Soldiers are infantry. Yes, a KATUSA will translate when he needs to, but that is not his primary duty. In fact, with the lottery system in place, most KATUSAs are not fluent enough to work as professional interpreters. The ROK Army translators, who are purely chosen by merit, are usually more qualified. If not a “military linguist,” then what does a KATUSA really bring to the fight?
[Two paragraphs omitted for sensitive information]
Now, by acknowledging that a KATUSA is a modern-day sepoy, a relatively inexpensive alternative for an American GI, I do not mean to be disgruntled or sarcastic. Because it was a choice I made. I applied to be a KATUSA, knowing that being a migrant worker on a US Army post for two years would be better than being a history professor at the Korean West Point for four years. Indeed, a migrant worker is what I am. I voluntarily came to live and work on American territory, do the same job as my American colleagues with one-tenth the pay, because I knew this would be still better than working in my own country. And I am happy I made that choice.
But truth be told, these are hard times to be a migrant worker in the United States of America. The disparity in salary is the least of my concern. What really hurts is the “If you don’t like it here, go back to your own country” mentality. In the KATUSA situation, it translates into “You shouldn’t complain because the ROK guys have it worse,” or even, “I will send you back to the ROK Army.” And I have to admit that I have heard this type of comments being made by US leaders multiple times, not always in a joking manner.
This is toxic. Divisive. Whenever I am told to be “grateful” for the mere fact that I am allowed to live here, eat at the DFAC, and go out on the weekends, I feel like my position is closer to that of migrant workers in the US, than to my fellow Joes in HHB. Surely, you would not say that to an American soldier?
Today, I was told to answer “What US leaders are responsible for and how to take care and empower KATUSAs.” I propose a simple rule of thumb.
Before you make any KATUSA comment, try putting in “Black” or “Woman” instead. Then you might rethink saying things like “I think KATUSAs are spoiled.” This is a basic EO rule. Whenever an individual is judged by his nationality before his merits, an EO violation is taking place. Treat every single one of the KATUSAs as an individual, not just another KATUSA. I know there are way too many Kims and Parks and Lees, but trust me, they all have different names, and they are not hard to pronounce if you try.
One more thing: please be a little more understanding of the fact that KATUSAs are conscripts. There is a reason why the US banned it a long time ago. It is inefficient. Sergeant Major Minton motivates us every morning with his great motto: “We get paid to this whooah.” I cannot agree more, but only with a small caveat: “4 dollars a day whooah.” If being professional means working as hard as one gets paid for, you do not want the KATUSA to be professional. He will not work hard but hardly.
The point is, we are all suffering here together. It is painful for me to imagine some of my American buddies spending the holidays away from their family. Mutual sympathy and tolerance and love is what we all need at this time of the year. Katchi Kapshida. Thank you.
December,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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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unbumsun · 7 yea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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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을 위한 변명
요즘 취업이 힘들다. 인문학 전공자들이 특히 죽어난다. 인문학이 국가 경제에 무슨 도움이 되겠는가? 대학은 앞다투어 인문학과를 통폐합하고 있다.
인문학은 사람을 삐뚤어지게 만든다. 나는 역사학 석사까지 따고서 지금 록밴드를 하고 있다. 내 주변에는 명문대를 졸업하고도 인생의 갈피를 잡지 못하는 인문학도들이 (나를 포함해서) 수두룩하다. 속된 말로 “노답”이다.
인문학은 원래 답이 없다. 사회과학과 다르다. 한국에서는 둘을 통칭하여 문과라고 하지만 확실히 구분할 필요가 있다. 사회과학은 자연과학과 마찬가지로 답이 있다. 과학이란, 현상을 분석하여 법칙을 밝히고 미래를 예측하는 행위다. 따라서 사회과학이 성립하려면 인간도 우주 만물과 같이 예측가능한 존재라는 전제가 있어야 한다.
물론 인간은 어느 정도 예측이 가능하다. 유전자와 성장 환경에 의해 프로그래밍 된 기계와 같으니까. 하지만 인간은 몹시 복잡다단한 기계다. 개인 간의 차이도 상당하다. 그렇기 때문에 사회과학은 불가피하게 인간에 대한 가정을 한다. 경제학자는 호모 에코노미쿠스를 상정하고 국제관계학자는 국가를 당구공에 비유한다. 단순화하고 획일화하여 일반화한다. 그래야만 법칙을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결과는 뻔하다. 경제학자의 예측은 일기예보보다 부정확하다. 정치학자 중 몇 명이나 트럼프의 당선을 예상했나? 사회과학의 진보와 상관없이 인류 사회의 미래는 여전히 불확실하다. 예나 지금이나 “사람 일은 모르는 거다.”
인문학은 이러한 불확실성을 겸허히 받아들인다. 예언을 꺼린다. 그저 과거 인간의 삶이 얼마나 다양했고, 어떤 과정으로 변해왔는지 이야기할 뿐이다. 가변성과 특수성과 다양성이 인문학의 본질이다. 만약 여태껏 지구상에 살았던 천억 명이 넘는 인간이 모두 같은 생각과 행동을 했다면, 사회과학은 자연과학 수준의 신뢰성을 얻을 테지만 인문학은 존재 이유를 상실할 것이다.
소크라테스가 남들과 달랐고, 플라톤은 그의 스승과 달랐으며, 아리스토텔레스는 그의 스승과 또 달랐기 때문에 서양 철학이 생겨났다. 같은 스페인 내전을 겪고도 헤밍웨이는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를 썼고 조지 오웰은 <카탈로니아 찬가>를 썼다. 내가 어려서 읽은 <어린 왕자>와 커서 읽은 <어린 왕자>의 의미는 천지차이다. 지금은 맞고 그때는 틀린 것이 아니다. 오웰과 헤밍웨이가 다른 것이다. 그래서 아름다운 것이고.
나는 석사논문을 쓰기 위해 18세기 혁명가 토마스 페인의 글을 모두 읽었다. 일년 가까이 매일 그와 대화했고 그의 유언을 읽으며 눈물 흘리기도 했다. 그러나 나는 아직도 페인이 어떤 사람인지 잘 모르겠다. “열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 하지 않던가. 당장 내 마음도 어느 콩밭에 가있는지 모르겠는데 이백년 전 죽은 사람의 마음을 어찌 알겠나. 공부를 하면 할 수록 더 알 수 없는 것이 바로 인문학이다.
그러나 그 답 없는 인문학이 없으면 자유도 없다. 다름을 쫓는 학문이 있어야 삶의 선택지가 다양해진다. 나는 한국 사회가 더 자유로워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답 나오는” 사람보다는 “노답”인 사람, 예측불가능하고 대체불가능한 사람이 필요하다.
20세기의 대표적 자유주의자이자 역사학자였던 이사야 벌린은 다음과 같은 칸트의 말을 즐겨 인용했다. “인간이라는 삐뚤어진 나무에서 꼿꼿한 것이 만들어진 적은 없다.”
인문학은 사람을 삐뚤어지게 만든다. 삐뚤어진 인간의 본성을 있는 그대로 보게 만들기 때문이다. 꼿꼿한 것을 만들려면 모난 곳을 깎아내야 한다.
나는 그게 싫다. 삐뚤어질 테다. 나를 위한 변명이자 인문학을 위한 변명이다.
(2016년 12월 강원도민일보 도민시론 기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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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unbumsun · 7 yea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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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로자식의 역사
20세기 한국사는 호로자식의 역사였다. 아버지를 잃은 자의 역사란 뜻이다. 조선시대 국가란 임금이었고 임금은 곧 나라의 아버지였다. 유교적 가부장제 아래 아버지 역할은 식구들을 보호하고 먹여 살리는 것이었다. 구한말 조선의 임금은 이 임무에 실패했다.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을 통해 조선은 파탄국가임을 증명했다. 동학운동을 스스로 제압할 힘도 없었다. 을미사변은 고종의 무력함을 백성들에게 적나라하고 상징적으로 보여줬다. 무뢰한들이 안방에 들이닥쳐 어머니를 능욕하고 살해해도 아버지는 도망칠 수밖에 없었다. 일본 식민정부가 들어서기 전까지 조선은 사실상 아버지를 잃은 나라였다. 다시 말해 무정부상태였다.
많은 조선인들이 천황이란 새 아버지를 부정했다. 그러나 대부분은 순응했다. 서자 취급당하고 서러웠지만 힘이 센 아버지였기에 거역할수 없었다. 독립운동가들은 천황에 대항할 조선의 아버지가 필요했으나 구하기 쉽지 않았다. 1919년 고종이 죽고 나서야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탄생한 것은 우연이 아니다. 임시정부 헌장은 대한제국 구 황실을 우대한다고 명시했다. 잃어버린 아버지를 되찾을 수 없음이 분명해진 후에야 독립운동가들은 민주공화제란 새로운 성격의 아버지를 택했다.
독립운동가들의 노선 갈등은 새 아버지가 되기 위한 싸움이었다. 민주공화제란 말은 왕정을 버리겠단 것만 분명히 했을 뿐 새 아버지가 누가 될지는 결정하지 않았다. 후보군은 다양했다. 레닌과 소련식 사회주의의 양자가 된 이들은 큰집 모스크바를 바라봤다. 하나(느)님 아버지를 선택한 이들은 자본주의와 기독교의 결합에서 서구열강의 비법을 발견했다. 민족이란 신비스럽고 웅대한 아버지를 선호한 이들은 단군왕검, 을지문덕, 이순신 등을 가리키며 잠들어있는 민족의 정력을 깨우려했다. 물론 여러 아버지들을 동시에 섬기는 이들도 많았다. 사회주의,자본주의, 민족주의는 딱히 상호배타적이지 않았다. 소수 국제주의자들을 제외하고 절대다수 독립운동가들은 좌우를 막론하고 민족주의자였다. 사민주의자들도 많았다. 하지만 조선의 어느 아버지도 동아시아와태평양을 지배하던 대일본제국 아버지 히로히토를 당할 수 없었다. 일제를 무너뜨린 건 독립운동가들이 아니라 진주만을 공격한 일본의 교만이었다.
그래서 일제 패망 후에도 대한민국이 아닌 미소 군정이 한반도의 새주인으로 군림했다. 두 열강은 애초부터 아버지 역할을 오래 할 생각이없었다. 사랑방 손님 정도였다. 이것이 19세기 식 일본 제국주의와 20세기 식 미국 및 소련 제국주의 차이다. 후자는 아버지가 돼 눌러앉기보다는 삼촌이 돼 적당히 관리��기만을 원했다. 그러니 아버지 책임인 보호 및 생계유지를 제대로 할 리 없었다. 비좁은 사랑방에 삼촌 둘이 선 그어놓고 앉아 ‘감 놔라 배 놔라’거리니 집안 꼴이 말이 아니었다. 해방공간은 또 다시 무정부상태였다. 테러단체들이 활개 쳤다. 조선인민공화국주역 여운형과 대한민국 임시정부 주석 김구의 암살은 을미사변만큼이나 상징적이었다.
토마스 홉스는 17세기 중반 잉글랜드 내전을 겪고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인 무정부상태를 막기 위해 ‘리바이어던(leviathan)’을 저술했다. 잉글랜드 내전은 크롬웰을 위시한 청교도 원리주의자들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의 재림이 임박했다고 믿은 제오왕국파, 급진적 평등주의를 주창한 디거파와 레벨러파, 신으로부터 직접 계시를 받을 수 있다고 주장한 퀘이커파 등 온갖 종파들을 낳았다. 무정부상태는 종말론적이고 구세론적인 신앙이 득세하기에 안성맞춤인 토양이다. 신라 멸망 후 등장한 궁예 미륵신앙이 전형적인 예다. 말세예언을 담은 ‘정감록’이 조선 후기 여러 혁명운동에 영향을 주긴 했지만 사실상 무정부상태가 된 구한말에 와서야 천도교, 증산계 종교, 대종교 등 체계화된 신흥종교가 탄생한 것도 이 때문이다. 외세의 침입과 조정의 실정으로 생존에 위협을 느낄 때, 전쟁의 살육과 공포가 예언서 속 말세를 연상시킬 때, 인간은 자연스레 구원을 갈망한다. 즉, 자신을 보호하고 먹여 살려줘야 할 아버지가 제 역할을 못할 때 새로운 아버지, 바로 구세주를 기다리게 된다. ‘지상낙원’ ‘개벽’ 따위 환상적인 말이 설득력을 얻는다.
식민지 상태도 이런 면에선 무정부상태와 크게 다르지 않다. 원하지 않는 새 아버지의 폭정 아래 사는 것이기 때문이다. 구세주의 지상천국 건설을 믿는 유대교는 유대민족이 수백 년에 걸쳐 이집트, 바빌로니아, 그리스, 로마제국의 지배를 받으면서 만들어낸 종교다. 모세는 유대민족을 이끌고 이집트를 탈출한 민족해방운동가였다. 예수 또한 로마제국 총독 본시오 빌라도 통치 아래 고난을 받고 있던 유대민족에게 구원을 약속한 ‘유대인들의 왕’이었다. 예수 숭배가 인류보편신앙으로 탈바꿈한 것은 성 바울의 작품이었다. 인류 역사는 언제나 제국의 역사였고 식민지배로 인한 종교 발생은 고대, 중세, 근대를 가리지 않고 계속됐다. 19세기 서구 열강들 침략에 대한 반작용으로 청나라에선 홍수전이 스스로 예수의 동생이라 주장하며 태평천국을 외쳤고 수단에선 무함마드 아마드가 이슬람 구원자인 마흐디를 자처하며 영국군에 맞섰다. 36년 간의 일본제국 지배도 한반도에 비슷한 양분을 제공했다. 앞서 말한 천도교계, 증산계, 단군계 신흥종교들은 이 기간 동안 확고히 자리 잡았다. 원불교도 본래 싯다르타의 가르침과는 다르게 지상에서의 낙원세계를 주장하며 이때 창시됐다. 물론 천주교와 개신교도 미국과 유럽에서 온 선교사들에 의해 깊게 뿌리내렸다. 일제의 탄압은 오히려 신앙을 굳건히할 뿐이었다.
한국전쟁은 무정부상태의 극치였다. 인구 2000만 중 200만이 넘게 죽은 전쟁이었다. 말세의 냄새를 맡지 못하는 것이 이상했고 구세주가 오리란 희망마저 저버리기엔 너무 절망스러웠다. 얼마 전 1300만 관객을 돌파해 역대 한국영화 2위란 성적을 거둔 ‘국제시장’은 한국전쟁이 아버지에 대한 갈구를 어떻게 증폭시켰는지 분명히 보여준다. 덕수는 전쟁통에 아버지를 잃는다. 국민을 보호해줘야 할 대한민국이란 아버지는 어디에도 없다. 건국대통령 리승만은 개전과 동시에 국민을 속이고 남쪽으로 줄행랑쳤다. 흥남부두의 구세주는 미군이다. 덕수는 그날의 충격적 체험 이후 평생 아버지를 기다리며 산다. 아버지의 재림에 대한 기대는 절대 반증할 수 없는 신앙이다. 아직도 오지 않았단 비관적 사실은 역설적이게도 곧 올 수도 있단 소망을 부채질한다. 덕수는 남한 국민들을 대표하지만 북한 인민들 경험은 더했다. 사망자도 북한이 남한의 두배 가까이 된다. 한국전쟁이란 ‘만인에 대한 만인의 전쟁상태’가 끝났을 무렵, 한반도 주민들은 듬직한 아버지가 불쑥 나타나 우뚝 서길 간절히 바랐다. 나쁜 놈들로부터 보호해주고 배고픔으로부터 구원해줘 약속된 땅, 지상낙원으로 이끌어주길 기도했다.
북한에선 김일성이 그 아버지가 됐다. 공산주의는 본래 세속화된 정치종교로서 기독교 특유의 목적론적 사관을 답습했다. 역사엔 끝이 있으며 그 끝엔 지상낙원이 도래해 인류의 모든 문제가 해결된단 유토피아적 사관은 기독교의 천년왕국설을 통해 유럽에 퍼졌다. 이는 윤회를 기반으로 한 동양사상에선 쉽게 찾아볼 수 없는 매우 서양적인 사상이다. 기독교와 결렬을 선언한 계몽주의 사류에서도 이러한 미신은 계속됐다. 노동자 혁명을 말미암아 역사의 끝에 도달하면 공산주의 세상이 열린단 마르크스의 목적론적 진보사관은 콩도르세, 헤겔, 콩트의 그것과 마찬가지로 영락없는 기독교 잔재다. 김일성은 마르크스의 유토피아주의에 스탈린스러운 개인숭배, 그리고 미제와 자본주의로 대변되는 악마학까지 결합시켜 완벽한 종교국가를 이룩했다. 그는 전쟁을 일으킨 장본인임에도 정치선전을 통해 책임을 미제에 돌린 후 스스로 인민의구세주로 자리매김했다. 김정일이 이끈 고난의 행군은 출애굽기를 연상시키는 정치수사법이었다. 이집트를 탈출하면서 유대민족이 겪은 고난이 야훼에 대한 원망보단 찬양으로 이어졌듯 최소 수십만 아사자를 낸 정치재앙도 위대한 지도자 동지에 대한 감사로 귀결됐다. 김정은의 집권으로 북한은 드디어 삼위일체를 달성했다. 죽은 지 20년 지난 김일성은 아직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주석이다. 국방위원장은 여전히 김정일이다. 김정은은 노동당 제일비서일 뿐이다. 북한은 어버이 수령의유령이 영원히 영도하는, 말 그대로 신들린 국가다.
남한은 전체주의 국가가 아니라 아버지가 조금 더 많았다. 김일성은 46년 갔지만 리승만은 12년 밖에 못하고 하와이 갔다. 그러나 김일성처럼 리승만도 국민을 보호하지 못한 자신의 책임을 성공적으로 빨갱이란 악마에게 돌리고 자신을 국부의 자리에 올렸다. 근대화의 아버지 박정희는 18년 밖에 못하고 총 맞아 죽었다. 17년 한 김정일보단 그래도 오래 한 것이다. 박정희 후임을 자청한 전두환은 8년 동안 아버지 노릇을 했고 그가 물러난 후에도 국민들은 그의 절친을 새 아버지로 모셨다. 심지어 민주화에도 아버지가 있었다. 민주화란 다름 아닌 국민이 주인 되는 일인데 그 마저도 아버지 영도가 필요했다. 하지만 북한과 달리 남한에선 이제 어느 대통령도 절대적인 아버지로 군림하지 못한다. 물론 박정희를 반인반신으로 추앙하는 유신 찌꺼기가 남아있긴 하다. ‘새마을운동’과 ‘조국근대화’ ‘민족중흥’ 등으로 정리되는 박정희의 유토피아주의는 북한에서 외쳐대는 ‘민족통일’ ‘사회주의 강성대국 건설’과 많이 겹친다. 민족통일은 이뤄질 수 없다. 한국은 절대 단일민족국가가 아니다. 남북한이 하나의 국가가 된다 해도 전 세계에 퍼져있는 한민족이 단일정부 아래 하나의 유기체 같은 집단이 돼 조화롭게 살 날은 오지 않을 것이다. 사회주의 강성대국은 당연히 환상이고 같은 이유로 근면, 자조, 협동이 꽃피는 새마을 또한 현실세계에서 불가능하다. 인간의 본성 때문이다. 조국근대화는 영원히 끝나지 않는 과정인 듯하다. 일제도 근대화를 했다고 하고 박정희도 했다고 하는데 아직도 신자유주의자들은 대한민국이 전근대적이라고 불평한다. 그들이 상상하는 근대는 마르크스의 원시 공산주의사회 또는 공자의 요순시대만큼이나 허황하다. 역사적으로 존재하지 않았던 과거의 이상적 사회, 즉 에덴동산이다. 아담 스미스는 신자유주의자가 아니었고 19세기 영국이나 미국은 국가의 경제 개입이 상당했다. 민족중흥은 정확히 뭘 의미하는지 알 수 없지만 박정희는 그것을 전 국민의 역사적 사명이라고 정의함으로써 자기 맘대로 수천만개인 삶의 의미를 정해줬다.
앞에서 아버지의 역할은 생존 보장이었다고 했다. 그러나 충격적 재난을 겪은 인간은 자신을 구원해준 아버지로부터 단순한 방어 및 먹이 그 이상을 원한다. 삶의 의미를 부여해주길, 자신이 당한 고통에 이유가 있었다고 설명해주길 바란다. 그래서 모든 성공적인 아버지들은 위안이 되는 얘기를 들려준다. 그 서사 구조에 따르면 재앙의 원인은 항상 일부는 내부의 부패와 무능, 다른 일부는 외부의 악마적 존재에 있다. 그러나 이 모든 고통의 끝엔 사회주의 강성대국, 선진 일류국가, 민족통일, 천년왕국, 지상낙원, 천국, 극락 등 만사형통의 세상이 펼쳐질 거라 예언한다. 다만 그 전까진 꾹 참고 아버지 말을 잘 들어야 한다. 이런 류의 소설은 주권침탈과 내전이라는 묵시적 재앙을 연달아 겪은 조선인민에게 달콤할 수밖에 없었다. 베트남도 비슷했다. 프랑스 식민지배에서 베트남전쟁으로 이어진 지옥의 구렁텅이에서 나라를 구한 호치민은 지금도 베트남 전역에서 그 얼굴을 만날 수 있다. 영국과의 피 튀기는 독립전쟁 후 민주공화제를 건설한 조지 워싱턴도 19세기 내내 미국인들의 신적 추앙을 받았다. 베트남은 도시 하나만 호치민이라 개명했지만 미국은 수도도 모자라 주까지 워싱턴이라고 명명했다. 서울은 다행히 지금도 서울이다. 놀랍게도 평양도 평양이다. 하지만 전후 베트남과 미국 인민들처럼 한국인들도 아버지의 나라가 오심을 열렬히 반겼다. 지난 반세기 동안 한국인들이 뼈를 깎는 고통을 감내하고 묵묵히 일할 수 있었던 이유, 흔히 말하는 대한민국 성장 동력은 바로 아버지에게 감사하고 보답하고픈 마음에 있었다.
오늘날 대한민국에서 가장 강력한 아버지는 박정희가 아니다. 하나(느)님 아버지다. 북한에 있는 김일성 동상, 초상화, 휘장의 개수와 남한에 있는 예수 동상, 초상화, 십자가 개수를 인구 비례로 분석하면 아마 비슷할 것이다. 북한이 세계에서 가장 철저한 신정국가라면 남한은 동북아에서 가장 기독교적인 국가다. 전 국민의 40% 정도가 기독교인이다. 국회 앞에 본부를 둔 여의도 순복음교회는 세계에서 가장 큰 교회다. 신도 수가 80만이 넘는다. 세계 10대 대형교회 중 5개가 한국에 있다. 남한에서 특히 개신교가 득세할 수 있었던 데엔 큰 삼촌, ‘엉클 샘’(UncleSam)의 영향이 컸다. 국부 리승만은 일찍이 미국 선교사들에 의해 감리교로 개종됐다. 미국 덕에 해방을 맞고 전쟁의 참패를 면한 한국인에게 미국은 그야말로 구세주였고 천조국임이 분명했다. 지금도 잘 나가는 대형교회 목사들 상당수가 미국 유학파다. 근대화 아버지 박정희가 민주화 아버지 김대중을 납치해 일본 앞바다에서 죽이려 할 때 제지한 것도 미국이었다. 독실한 천주교 신자인 김대중은 그날 직접 예수를 봤다고 고백했다. 소망교회 장로 출신 이명박은 서울시장 재임 당시 장충체육관에서 ‘수도 서울을 하나님께 봉헌한다’고 말했다. 대한민국 대통령재임 당시엔 무엇을 바쳤을까. 이명박의 자서전 제목은 ‘신화는 없다’다. 자신의 헌신과 노력에 대한 하나님 아버지의 은총만 있을 뿐이다. 청계천도 대운하도 고로 다 하나님 계획이다. 박근혜는 딱히 하나(느)님 아버지를 섬기지 않는 것 같다. 그의 동생 박근령 말마따나 이미 반인반신인 아버지를 가졌기에 필요가 없을 터이다.
국산종교 중 박정희 숭배보다 더 성공한 것이 하나 있다. 통일교다. 문선명은 스스로 3번째 아담이라고 주장했다. 세상의 모든 악은 인류의 첫번째 부모인 아담과 이브가 성생활을 문란하게 해서 생겨난 것이다. 이브가 사탄의 꼬임에 넘어가 사과를 따먹었단 것은 사실 둘이 섹스를 했단 뜻이다. 이는 하나님이 정해주신 신성한 부부의 연을 저버린 죄악이다. 인류의 성적 타락을 구제해줄 수 있는 이는 하나님 뜻대로 결혼하고 중생들을 짝지어 줄 참부모밖에 없다. 두 번째 아담이었던 예수는 미혼이었기 때문에 이 임무를 수행하지 못했다. 세 번째 아담인 문선명은 한 학자와 결혼했기에 참 어버이 구실을 할 수 있다. 통일교의 유명한 집단결혼은 이렇듯 매우 창의적인 발상에서 나왔다. 문선명의 종교관은 한국전쟁 중 완성됐다. 북한의 종교탄압 때문에 흥남에서 강제노역을 하던 문선명은 유엔군에 의해 석방된 후 자신의 제자들을 데리고 남쪽으로 향했다. 부산에서 피난 중 ‘원리원본’을 집필했고 휴전 후 1954년 서울에서 통일교를 창설했다. 이로써 한반도는 새 예루살렘이 됐다. 세계평화통일가정연합의 현 신도 수는 확실히 알 수 없지만 한국과 일본, 미국을 중심으로 50만은 족히 넘는 것으로 보인다.
통일교와 북한식 사회주의는 세습왕조란 점 말고도 공통점이 많다. 둘이 제시하는 지상낙원의 핵심은 평화통일과 세계평화다. 그 방도는 만인이 참된 어버이 밑에서 하나의 화목한 대가족을 이루는 것이다. 말할 것도 없이 헛된 꿈이다. 문선명은 김일성을 처음 만났을 때 ‘오랫동안 헤어진 형제와도 같았다’고 회상했다. 김정일은 문선명 탄신기념일에 롤렉스를 선물했다. 남북한 아버지들은 공산주의와 반공주의라는 겉보기에 상충하는 간판을 내걸고 있었지만 차이점보다 공통점이 훨씬 많았다. 비슷한 역사적 충격에서 발생한 인간의 필요에 대한 함수로 탄생했기 때문이다. 조선왕조란 아버지를 잃고 방황하는 인민들을 보호해주고, 먹여 살려주고, 삶의 의미까지 부여해줬다. 탈북자들 대다수는 어버이 수령을 버리고 금세 하나님 아버지를 택한다. 두 아버지들이 수행하는 정신적 기능이 유사하기에 크게 어렵지 않다. 현재 남한이 북한보다 살기 좋은 사회가 된 이유는 남한의 아버지가 북한의 아버지보다 더 훌륭해서가 아니다. 단지 남한에 더 다양한 아버지들이 있기 때문이다. 자유민주주의가 공산주의보다 우월한 이유는 간단하다. 여러 가치가 공존하는 다원주의가 가능하다는 점이다.
본 잡지의 발행인��을 처음 만난 후 나는 탈진영세대란 무엇인가란 질문을 안고 돌아왔다. 내 답은 이렇다. 21세기 한국에서 탈진영이란, 지난 세기 한국사를 결정지었던 아버지들로부터의 독립을 뜻한다. ‘진영논리에 얽매인다’는 것은 특정 아버지에 대한 숭배와 그 아버지 말씀에 대한 복종을 일삼는단 말이다. 김일성, 박정희, 리승만, 김대중, 하나님, 하느님, 예수, 한울님, 부처님, 문선명, 단군, 옥황상제 등등. 이병철, 정주영, 구인회, 김종희 등 재벌가 아버지들은 다루지 못했지만 그들이 대한민국에 끼치는 영향은 예수의 그것보다 광범위할지도 모른다. 20세기 한국사는 미약한 조선의 아버지가 죽음으로써 시작됐다. 21세기 한반도 하늘 아래엔 드세디 드센 아버지들이 너무나도 많다.
나는 지금의 청년 세대가 아버지로부터 독립할 준비가 돼있다고 본다. 독립이란 아버지를 버리고 매장하는 것이 아니다. 모든 아버지들은 공과가 있다. 비판할 것은 비판하고 감사할 것은 감사하면 된다. 다만 이제 우리는 독립된 위치에서 스스로, 그리고 회의적으로, 사고해야 한다. 우리가 듣는 아버지 말씀들은 전부 해묵은 것들이다. 김일성의 말 한마디 한마디는 아직도 인민들을 혹사시키고 있으며 리승만과 박정희의 잔재는 종북몰이로 정치적 자유를 억압하고 있다. 하나(느)님 아버지의 수천 년 전 협박은 성소수자들을 짓누르고 있다. 탈진영세대란 바로 현실주의 세대다. 20세기 아버지들이 약속한 이상주의적 지상낙원은 오지않을 것이다. 사회주의 강성대국도, 선진 일류국가도, 민족평화통일도, 천국도, 극락도 다 부질없는 기대다. 영장류의 한 개체로서 존재하기 위해 주어진 선택지에서 차악을 선택하는 것이 우리 삶의 전부다. 청년세대는 더 이상 아버지가 정해준 삶의 의미로 만족할 수 없다. 하나(느)님의 어린 양도,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도 부족하다. 그때그때 여러 가지아름다운 삶의 의미들을 스스로 설정해나갈 뿐이다. ‘국제시장’의 영어 제목은 ‘아버지를 위한 송가’(Ode to My Father)였다. 1300만이나 봤다니 그 노래 크게 한번 불렀다 싶다. 그렇다면 이제 아버지께 작별인사를 올려도 되지 않을까? 21세기 한국사는 자랑스런 호로자식의 역사가 돼야 한다. 아버지는 이제 푹 쉬셔도 좋다.
(2015년 7월 30일 잡지 ‘디스라이크' 기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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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unbumsun · 7 yea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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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주의와 채식주의
여성주의가 화두다. 바람직하다. 하지만 채식주의에 대한 논의는 아직 미미하다. 소설 <채식주의자>의 인기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 글에서 여성주의와 채식주의를 연결하려 한다.
여성주의란 성 차별을 철폐하여 여성 해방을 이루려는 움직임이다. 가부장제, 여성 혐오, 강간 문화 등 여성을 억압하는 사회 구조를 해체하는 것이 주요 목적이다. 그 전제는 성 평등이다. “인간”이라면 성에 상관 없이 똑같이 대우 받을 권리가 있다는 것이다. 여성주의는 그래서 남성이 갖는 특권을 비판하며 여성 및 성 소수자가 겪는 고통에 대한 의식을 높인다. 궁극적으로는 남성과 여성이라는 인위적 이분법을 타파함으로써 생물학적, 사회문화적 성이 개인의 복지에 아무런 영향을 끼치지 않는 성 평등 사회를 건설하려 한다.
동물권 운동이란 종 차별을 철폐하여 동물 해방을 이루려는 움직임이다. 공장식 축산, 동물 학대, 육식 문화 등 비인간 동물을 억압하는 사회 구조를 해체하는 것이 주요 목적이다. 그 전제는 종 평등이다. 고통을 느낄 수 있는 동물, 다시 말해 “지각의식 있는 존재”라면 종에 상관 없이 똑같이 대우 받을 권리가 있다는 것이다. 동물권 운동은 그래서 인간이 갖는 특권을 비판하며 가축, 실험동물 등이 겪는 고통에 대한 의식을 높인다. 궁극적으로는 인간과 비인간이라는 인위적 이분법을 타파함으로써 생물학적, 사회문화적 종이 개체의 복지에 아무런 영향을 끼치지 않는 종 평등 사회를 건설하려 한다.
여성주의와 동물권 운동은 차별 철폐라는 공통 목표를 갖는다. 채식주의는 이러한 동물권 운동의 기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성주의자가 고기를 먹는다는 것은 종 차별주의자임을 인정하는 것이다. 성 차별은 반대하면서 종 차별은 찬성할 수 있는 근거가 있을까?
육식은 오랫동안 행해온 인간의 “자연스러운” 행위다? 강간, 살인도 그렇다고 할 건가? 여성의 몸에 대한 착취가 수 천년간 이뤄져왔다고 해서 그것이 옳은 것은 아니다. 동물의 몸에 대한 착취도 마찬가지다.
인간은 지적으로 우월하기 때문에 다른 동물을 지배할 권리가 있다? 어디서 많이 들어본 논리 아닌가? 성 차별 주의자, 인종 차별주의자의 단골 메뉴다. 물론 인간은 특별하다. 강한 자의식과 메타인지능력을 가졌다. 하지만 한 집단의 특별함이 다른 집단에 대한 지배를 정당화하진 않는다. 여성의 공감 능력이 뛰어나다고 가모장제가 옳은가? 돌고래의 초음파 능력은? 불알 차고 나온 게 벼슬이 아니라면 두뇌 큰 것도 대수롭지 않아야 한다.
나는 지난 오 년간 채식을 하면서 이런 반론도 들었다. “나도 동물을 사랑한다. 그래서 맛있게 ���는다.” 여성주의자라면 역시 익숙한 방어 기제일 것이다. “난 여자를 좋아하는데 왜 ‘여혐’이냐?”는 혹자의 말이 떠오른다.
나는 여성주의와 동물권 운동이 같이 가야한다고 생각한다. 십구 세기 여성주의자들과 노예제 폐지론자들이 힘을 모았던 것처럼. 여성을 억압하는 바로 그 사회 구조가 동물도 억압하고 있다. 공장식 축산에도 잔학한 성 차별이 존재한다. 육류와 유제품의 절대다수는 암컷의 몸에서 착취한 것이다. 새끼를 빼앗기어 울부짖는 암퇘지의 눈을 본 적이 있는가?
한국 사회의 일상적 성 차별을 자각하고 분노하는 이들이 많아졌다. 곳곳에서 여성 혐오의 민낯이 드러난다. (방금 사전에 “민낯”을 검색했는데 “여자의 화장하지 않은 얼굴”이라고 나온다. 시정하자.) 한국인의 종 감수성도 성 감수성 만큼 커질 수 있을까? 투뿔한우집 간판에 소가 웃는 것을 보고 섬뜩할 수 있을까? 여성은 스스로 연대할 수 있지만 동물은 그러지도 못한다.
결국 공감의 영역을 넓히는 일이다. 같이 아파하고 사랑하는 대상을 인간으로만 한정할 이유는 없다.
(2016년 9월 22일 강원도민일보 도민시론 기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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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unbumsun · 7 yea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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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와 엘리자베스
“Video et taceo.”
“진실을 알고 있지만 말하지 않는다.” 잉글랜드의 왕 엘리자베스 1세(Elizabeth I, 1533-1603)의 좌우명이었다. 대한민국의 대통령 박근혜의 행태이기도 하다.
지난 대선 TV 토론에서 박근혜는 엘리자베스 1세를 자신의 역할모델로 꼽았다. 나는 경악했다. 이 사람은 정녕 민주공화국 대통령 선거에 나와서 전제군주를 본받겠다 한 건가? 엘리자베스 2세도 아니고 1세를?
왜냐고 묻자 그는 “자기가 불행을 겪었기 때문에 남을 배려할 줄 알았고 늘 관용의 정신을 갖고 합리적인 방법으로 국정을 이끌었다”고 설명했다.
2004년 한나라당 대표 취임 때도 그는 같은 질문에 “엘리자베스 1세는 어려서 고생을 많이 했다. 음모도 있었지만 잘 참아내 사려 깊은 지도자가 됐다”고 답했다.
박근혜가 엘리자베스를 좋아하는 이유는 어떠한 사상이나 정책 때문이 아니다. 삶에 공감하기 때문이다. 공주로서 비슷한 “불행을 겪었기 때문에,” “어려서 고생을 많이” 했지만 “잘 참아내” 왕이 되었기 때문이다.
둘은 실제로 닮은 구석이 많다.
1. 엘리자베스도 어머니를 비극적으로 잃었다. 아버지 헨리 8세의 둘째 부인이었던 앤 볼린(Anne Boleyn)은 남편이 원하는 아들을 낳지 못하자 내란과 간통 죄로 참수당했다. 문세광의 총탄에 죽은 육영수 역시 우연이지만 박정희의 둘째 부인이었다.
2. 박근혜는 2006년 지충호에게 커터칼로 피습당했다. 엘리자베스도 죽을 고비를 여럿 넘겼다. 1571년에는 리돌피(Ridolfi)라는 은행가가, 1586년에는 배빙턴(Babington)이라는 귀족이 암살을 기도했다.
3. “처녀왕” 엘리자베스는 평생 결혼하지 않았다. 후대를 걱정하는 신하들에게 “짐은 국가와 결혼하였다”고 잘라 말했다. 박근혜 또한 “내게 자식이 있기를 하냐”며 “국가와 결혼했다”고 말했다.
4. 엘리자베스는 천주교와 개신교를 적당히 섞은 “성공회”라는 신생 종교에 몸담았고 1559년 잉글랜드 성공회 최고 취리자로 추대됐다. 박근혜는 기독교와 불교를 적당히 섞은 “영생교”라는 신생 종교에 빠졌고 1975년 대한구국선교단 명예총재로 추대되었다.
5. 엘리자베스의 오랜 친구인 로버트 더들리(Robert Dudley)는 평생 왕의 총애를 받으며 비선실세로 군림했다. 그 신임은 더들리의 조카인 존 디(John Dee)에게까지 이어졌다. 점성술사였던 디는 엘리자베스의 대관식 날짜를 정해주는 등 여러 신비로운 조언을 해주었다. 박근혜의 오랜 친구인 최순실도 대통령의 총애를 받으며 비선실세로 군림했다. 영생교 교주 최태민에 대한 박근혜의 신앙이 그의 딸인 한 최순실에게까지 이어진 것이다. 최순실은 박근혜의 취임식에 오방낭을 장식하는 등 여러 신비로운 조언을 해주었다.
박근혜는 분명 엘리자베스 1세를 따라하겠다고 했고, 그 약속을 성실히 이행했다. 그가 제왕적 통치 방식을 택하리라는 사실을 몰랐던 국민이 있나?
“Video et taceo.”
직역하면 “나는 보고있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이러한 우유부단(優柔不斷)이 바로 제왕적 통치의 핵심이다. 어물어물하고 있으면 신하들이 알아서 왕의 의중을 헤아리고 해법을 제시한다. 그 해법이 통하면 왕의 덕이요, 안 통하면 신하의 탓이리라.
새누리당은 지난 29일 거국내각총리로 김종인을 추천했다. 박근혜는 아무 말 없이 웃어 넘기기만 했다. 청와대는 이 와중에도 꼬리 자르기에 여념이 없다. 박근혜가 먼저 구국의 결단을 내릴 가능성은 없어 보인다.
결단은 우리의 몫이다. 박근혜가 엘리자베스 1세처럼 군다고 우리도 그의 신민으로 남아있을 것인가. 보고만 있고 아무 말도 하지 않을 것인가. 진실을 알고도 말하지 않을 것인가.
(2016년 11월 3일 강원도민일보 도민시론 기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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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unbumsun · 8 yea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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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이 결국 유럽연합에서 탈퇴했다. 어리석은 결정이었다. 거의 모든 전문가가 반대했다. 경제적, 정치적 재앙이다. 조사에 따르면 상류층, 청년층, 혹은 고등교육을 받은 사람일 수록 잔류를 원했다. 노동계급, 노년층, 혹은 고등교육을 받지 못한 사람일 수록 탈퇴를 원했다. 만약 영국 지배계급 마음대로 했다면 이런 일은 없었다. 하지만 데이비드 캐머런 총리는 이 중요한 사안을 국민 투표에 부쳤고, 영국 국민은 어리석은 짓을 했다. 미국 언론인 존 캐시디는 “영국인들은 더이상 미국인 보고 멍청하다고 놀릴 수 없다”고 조롱했다. “미국인들이 연말에 트럼프를 뽑지 않는 이상.” 그렇다. 도날드 트럼프 같은 선동가를 대통령으로 뽑는 국민을 현명하다 할 순 없겠다. 그런데 영국인들도 나이젤 파라지 같은 선동가의 손을 들어준 마당에 미국인들이라고 못 할까? 트럼프의 당선 가능성은 지금 어느 때보다 높다. 1930년대가 생각난다. 대공황으로 인해 자본주의 및 자유주의 체제에 대한 회의가 팽배하던 시절, 서구 민중은 파시즘과 공산주의에 열광했다. 히틀러는 선거를 통해 민주적으로 선출된 지도자였다. 외국인 혐오적이며 민족주의적인 정치 수사가 난무했다. 자본가를 힐난하면서 그 뒤에 유태인이 있다고 모함했다. 무솔리니는 로마제국의 옛 영광을 되찾자고 국민을 현혹했다. 극우 선동가들은 제도권의 부패와 무능을 공격하면서 자신들이야말로 진짜 민중을 대표하는 민주주의적 지도자라 외쳤다. 물론 트럼프는 히틀러가 아니다. 파라지도 무솔리니가 아니다. 그러나 작금의 위기를 간과해서는 아니된다. 1930년대 서구 민중이 중도 정당들을 버리고 극우와 극좌를 선택했을 때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크게 두 가지다.1)자본주의에 대한 회의감. 2)제도권 자유주의 정당들에 대한 불신. 1930년대에는 이것들이 히틀러와 무솔리니와 스탈린에 대한 지지로 이어졌다면 2010년대에는 파라지와 트럼프와 버니 샌더스에 대한 지지로 이어지고 있다. 극우는 이러한 분노를 이민자에 대한 혐오로, 극좌는 상위 일 프로에 대한 혐오로 분출한다. 다시 말하지만 트럼프는 히틀러가 아니고 샌더스도 스탈린이 아니다. 그저 1930년대와 비슷한 대중의 요구를 지금은 그들이 대변하고 있을 뿐이다. 최근 급속한 경제 자유화와 이민의 증가는 노동계급에게 큰 상실감을 안겨주고 있다. 영국 지배계급은 통계 자료를 들며 “유럽연합은 좋다”고 말하지만 노동계급은 그것을 피부로 느끼지 못한다. 이민자가 몰려와 자신의 일자리를 빼앗는 것만 보인다. 미국 노동계급은 월가 금융권력에 매수된 공화당과 민주당 모두에게 환멸을 느낀다. 트럼프나, 트럼프 돈을 받은 힐러리나, 다 똑같기 때문에 샌더스 아니면 안 된다고 믿는 이가 많다. 트럼프는 적어도 자기 돈으로 정치하기 때문에 믿을 수 있다는 이도 많다. 트럼프와 샌더스 지지자의 공통분모는 제도권에 대한 반감이다. 브렉시트 지지자들이 전문가의 경고를 무시한 것과 같다. 지배계급에 대한 불신이 가득한 상황에서 그들이 제시하는 ‘논리’와 ‘사실’은 무의미하다. 파라지와 트럼프가 망언을 계속해도 지지율이 끄떡없는 이유다. 서방세계 제도권 정당들이 이러한 심리를 헤아리지 못한다면 브렉시트는 긴 재앙의 시작이 될 것이다. 영국 국민을 멍청하다고 냉소적으로만 볼 수 없다. 그들은 금융위기로 상징되는 자본주의의 한계, 그리고 거대 자본에 매수된 정치권력의 비민주성을 잘 알고 있다. 브렉시트는 힐러리에게 큰 경고다. 트럼프 대통령이 얼마나 위험한지 합리적으로 설득하는 것은 먹히지 않는다. 유럽연합 탈퇴가 얼마나 위험한지 누가 몰랐나? 영국인은 자신의 분노를 이민자로 돌린 선동가를 택했다. 제도권에 대한 미국인의 반감을 힐러리가 해소하지 못한다면, 트럼프가 세상에서 가장 막강한 사람이 될 수 있다. 끔찍하다. 그리 된다면 자유민주주의는 크게 퇴보할 것이고, 미국은 영국과 마찬가지로 초라하고 지저분하게 몰락하는 제국의 모습을 보여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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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unbumsun · 8 yea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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헐버트의 한글사랑 뜻 본받아 우리 말글 보호하자!
[2013년 8월 12일 헐버트 64주기 추모식에서 낭독한 대국민 호소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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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머 헐버트 (1863-1949)
헐버트는 1890년 ‘사민필지’ 서문에서 당시 조선의 현실을 이렇게 개탄했습니다. “중국 글자로는 모든 사람이 빨리 알 수도 없고 널리 볼 수도 없는데 조선 언문은 본국의 글일 뿐더러 선비와 백성과 남녀가 널리 보고 알기 쉽다. 슬프다! 조선 언문이 중국 글자에 비하여 크게 요긴하건만 사람들이 요긴한 줄도 알지 못하고 업신여기니 어찌 안타깝지 아니하리오.” 수세기 동안 내려오던 조선의 반 한글문화를 제3자의 입장에서 통렬하게 비판한 것입니다 . 헐버트는 또한 1892년 발표한 ‘The Korean Alphabet II (한글 II)’라는 논문에서 “문자사에서 한글보다 더 간단하게, 더 과학적으로 발명된 문자는 없다”라고 쓸 만큼 한글의 실용성과 우수성을 높이 평가했습니다. 그 후 1894년 국문 칙령과 1896년 독립신문이 나오는 데는 헐버트의 이러한 한글 예찬론이 큰 영향력을 발휘했습니다. 주시경과 함께 한글에 띄어쓰기와 점찍기 등을 도입하고 한글 자강운동을 이끈 헐버트의 노력은 우리가 깊이 되새기고 감사해야 할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올해 서울시가 한글마루지 사업의 일환으로 주시경과 헐버트의 기념공간을 건립하기로 한 것은 참 기쁜 일입니다. 하지만 우리 말글 생활의 현주소를 돌아보면, 곧 세워질 두 사람의 기념공간 앞에 서기가 부끄럽습니다. 지금 대한민국에는 120년 전 헐버트가 개탄했던 반 한글문화가 새로운 형태로 되살아나고 있습니다. 한글을 업신여기고 한자를 숭상하던 사대주의적 태도가 맹목적 영어 숭배주의로 부활하고 있는 것입니다. “힐링, 스타트업, 멘토, 인큐베이팅”이 “치유, 창업, 선생, 육성”을 밀어내고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도시의 간판과 아파트 주소는 국적과 의미도 알 수 없는 단어들로 넘쳐납니다. 심지어 정부기관의 안내책자나 공문서도 우리말 대신 영어를 로마자 그대로 표기하는 일 이 다반사입니다. 이러한 반한글 문화를 부채질하는 일등공신은 바로 방송과 언론, 공공기관, 그리고 지식인들의 무분별한 영어 남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조선말기, 대한제국 시대에 한자와 일본어에 밀려 제 빛을 발하지 못한 한글을 보며 안타까워했던 헐버트. 그러한 헐버트가 오늘날 자신의 모국어인 영어와 영문을 받들고 한글을 업신여기는 대한민국의 모습을 본다면 어떻게 생각할까요?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습니다. 반한글적 영어숭배주의는 한국의 언어 식민지화를 부추기며, 영어에 능숙하지 않은 대다수의 국민을 기본적 알권리조차 박탈당한 이등 시민으로 전락시킵니다. 헐버트의 독립정신과 한글 사랑을 본받아 몸소 실천하고자 하는 우리 헐버트청년모임 일동은 이��한 사회 풍토를 개선하여 아름다운 우리 말글을 지켜나갈 것을 결의합니다. 이에 헐버트청년모임 일동은 다음과 같이 호소합니다. 가) 정부기관, 공기업 등 공공기관 명칭은 한글 표기를 원칙으로 하고 로마자 표기를 하더라도 한글로 병기할 것을 요구합니다. 나) 정부기관, 공기업 등 공공기관은 공문서나 각종 홍보물에서 국립국어원이 인정한 외래어 이외의 외국어 사용을 삼가야 합니다. 다) 언론기관은 기사, 대본작성과 출판에 있어서 불필요한 외국어 사용을 멈추고 왜곡된 외래어를 우리말로 순화하는 노력을 기울여야 합니다. 라) 전 국민에게 호소합니다. 우리 말글을 보호할 수 있는 궁극적 주체는 시민사회입니다. 아름답고 실용적인 우리 말글에 대한 자긍심을 갖고 일상에서부터 우리 말글 보호 운동을 시작할 것을 제안합니다. 미국인임에도 불구하고 한글 사용을 강력히 주창했던 헐버트의 정신을 본받아 소중한 우리 말글을 지켜냅시다! 2013년 8월 12일   (사)헐버트박사기념사업회 헐버트청년모임 대표 전범선 외 회원 일동 
관련 기사 : http://www.newsis.com/ar_detail/view.html?ar_id=NISX20130822_0012303290&cID=10201&pID=10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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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unbumsun · 8 yea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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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fining My Own Dartmouth
[2013년 5월 3일 다트머스 교내지에 기고한 대학생활 회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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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becca Schantz / The Dartmouth Staff
Dartmouth is America for me. My entire American experience consists of my three years in Hanover, plus several minor excursions to other pockets of this giant country. I understand that an Ivy League institution with 4,000 high-achieving college kids is a rather misrepresentative sample. But every time I leave the Dartmouth bubble to find the “real America,” I am left more and more confused as to which image of America holds the truth. Portland, Ore., is nothing like Hanover, and in Los Angeles, Beverly Hills exists side by side with Koreatown. Soon I gave up the futile pursuit of one, true America. I decided to construct my own America, based on what I found here at Dartmouth.
It didn’t take long for me to realize that there was no such thing as the “real Dartmouth” either. A Dartmouth Dining Service employee’s life seemed to have little in common with that of a fraternity bro; computer science majors lock themselves up half-underground in Sudikoff Hall while studio art majors get inspired in the Black Family Visual Arts Center. And needless to say, a rape survivor’s Dartmouth is poles apart from a rapist’s Dartmouth. Everyone has their own Dartmouth, and no Dartmouth is more “real” than others’.
My Dartmouth is as unique as everyone else’s, but in a quite unusual way. I am not particularly “social” here. The set of rituals required to be “social” seemed very strange and foreign to me. I am from South Korea, where a student’s job is, surprisingly, to study. Friday is just another day before Saturday and on Saturdays we have classes. I do not believe there is a Korean expression for “hanging out.” I found it bizarre that my friends here felt the sacred duty to be out on Friday nights. Fraternity culture did not strike me as beautiful, and I never found pong fun or a good way to consume alcohol. This is not to say that all Koreans are like me, but many of us who come to Dartmouth straight from Korean high schools, or the so-called “FOBs,” do feel this way.
As a result, I hardly went out and stayed unaffiliated. I knew I was missing out. But I did not want to be what I was not in order to be part of something that I did not really enjoy. On weekends, I jammed with my band, the Shas, went to movies and concerts at the Hop, chatted with a handful of my friends over a bottle of beer (literally, as I am a notorious lightweight) or Skyped my girlfriend in Korea. Naturally, I felt alienated from the Dartmouth social scene.
For the first time in my life, I was an outsider. But an outsider also has the most time to observe, philosophize and criticize. The most fundamental question in my mind was: Why did I come all the way here for a college education? What was so great about Dartmouth and America that made me leave my family and friends back home? The most obvious answer was that the U.S. is the most powerful country in the world, and it was very reasonable for me to attend one of the most prestigious schools in the country. The English language is power, and so is the Dartmouth diploma.
But why is the U.S. the most powerful country at all? If I were born in Korea 100 years ago, I would have applied to a university in Tokyo; 200 years ago, I would have gone to Beijing. Of course, my history classes have offered me many convincing explanations as to how the U.S. became so powerful. But military budgets, nuclear arsenals and a liberal-capitalist world order did not satisfy me. I wanted to be sure that I came to America not just because it possessed the greatest amount of wealth and capacity for mass destruction. I wanted to convince myself that I came to Dartmouth for something more than the diploma and a six-figure salary.
And, fortunately, I got the answer I wanted during my last term here at Dartmouth. The series of events that followed the protest against the Dimensions show, for me, proved the greatness of Dartmouth and America. One may think this ironic. Didn’t the protesters declare that “Dartmouth has a problem”? Didn’t the hateful comments on Bored at Baker reveal the ugliest side of Dartmouth?
Of course Dartmouth has a problem. But what matters is how the community deals with a problem, or whether it deals with it at all. And Dartmouth has shown some admirable reactions to the problems it faces. People cared. People spoke, wrote, cried and tried. Hundreds voluntarily came to the speeches and teach-ins last Wednesday to share their opinions. Students and faculties of all color, class, creed and culture gathered together to fix the community. The administration provided the environment in which discussions could take place. The newspapers reported, and people agreed and disagreed. In short, I saw American democracy at work.
Witnessing all this, I came to understand how such a vast, diverse country like the U.S. can still be one country. I finally felt the existence of the “Dartmouth community” which I had thought was purely imaginary. I realized how it was possible for an outsider like me to still feel part of the campus. It made sense how so many Korean immigrants, including some of my relatives, could find themselves at home in the States. If there was anything worth calling the “real Dartmouth” or the “real America,” it is a culture of self-criticism, awareness and progress that keeps things from falling apart. On the soil of careful thoughts and concerns, love seemed to blossom. As a Dartmouth student, I was proud. As a non-American, I was envious.
The most amazing thing about Dartmouth for me is that I have emerged out of it a very different person than I used to be, although I hardly took an active part in it. To be honest, I came to Dartmouth a homophobe, a sexist and an ultra-nationalist. But three years of listening, observing and reflecting at Dartmouth set me free from such bigotry. I don’t think I made much of an impact at Dartmouth, but surely Dartmouth has changed me a lot, hopefully for the better. To the voices of Dartmouth that kept me questioning myself Vox Clamantis in Deserto I am deeply grateful. This is my Dartmouth, and my America.
http://thedartmouth.com/2013/05/03/ttlg-defining-my-own-dartmout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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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unbumsun · 8 yea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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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나다 웹진 인터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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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unbumsun · 8 yea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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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나 씨와의 두번째 인터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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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unbumsun · 8 yea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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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트머스 재학 시절 교내 잡지 인터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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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unbumsun · 8 yea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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