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십삼천은 땅에 세워진 하늘나라로서, 곧 불교에서 말하는 수미산의 두 번째 하늘인 제석천의 배달조선의 신전들입니다.
그러므로 이 공사에서 사람의 숫자를 33으로 맞춘 것은 선천의 신전조직에 맞춘 것이고,
동시에 동양과 서양의 장상신을 모두 합친 숫자이기도 합니다. 서양의 장상신은 십이사도의 열두 명이며, 동양의 장상신은 이십사 장의 스물네 명입니다.
천간지지를 합쳐서 스물넷이 되는 이유는 간지를 이용하여 만들어진 역법(曆法)으로 시간과 공간을 종합하여 절후(節侯)를 만들어 썼기 때문이고, 이 절후수가 장상신의 수가 되는 이유는 당태종을 따른 이십사장을 절후문과 관련시켜 성도들의 위상을 결정했기 때문입니다!
[대전 4- 162] 다시 비에 물을 적셔 그 방벽(房壁)에 인형을 그리고 그 앞에 청수를 놓고 꿇어앉으사 상여(喪輿) 소리를 하시며 가라사대 이마두(利瑪竇)를 초혼(招魂)하여 광주 무등산 상제봉조(上帝奉詔)에 장사(葬事)하고 최수운을 초혼하여 순창 회문산 오선위기에 장사하노라 하시고 종도들에게 이십사절(二十四節)을 읽히시며 가라사대 그 때도 이 때와 같아서 천지의 혼란한 시국(時局)을 광정(匡正)하려고 당태종(唐太宗)을 내고 다시 이십사절을 응(應)하여 이십사장(二十四將)을 내어 천하를 평정(平定)하였나니 너희들도 장차 그들에게 못지 않은 대접을 받으리라 하시니라!!!
동서양을 합하면 36장상신이 되는데 33천수로 맞춘 이유는 제석천의 수에 맞춘 것도 있지만, 나머지 세 사람이 서양 하나(1), 동양 둘(2)로 나뉘어 동서양을 통합하는 역할을 담당하고 증산상제님께 응기해 있기 때문이라 생각됩니다.
그래서 이 공사가 삼일(3*1)운동으로 드러나지요.
열사람이 있다가 한 사람이 도망하면
“열사람이 있다가 한 사람이 도망하면 아홉 사람은 그 해를 입어 죽는다”고 하신 이유는 이 공사가 무극대도를 여는 공사이기 때문입니다.
무극을 상징하는 수는 십(十)이기 때문에 후천을 열수(十數) 있는데, 하나가 빠지면 다시 옛날의 구수(九數=舊數)로 돌아감으로서 무극대도를 열 수 없게 된다는 뜻입니다!
*화지진(火地晉)*
화지진(火地晉)괘는 리상곤하(離上坤下)의 괘로서 지평선에 해가 걸려있는 형상을 나타내는데, 이 형상 때문에 불이 나서 타오르는 모습인 화지(火地)를 나타내기도 합니다.
그런데다가 이 괘는 주역 서괘전(序卦傳)을 참조하면 해가 뜨는 모습 보다는 해가 지는 모습입니다.
왜냐하면 화지진 다음 괘가 지화명이(地火明夷)이기 때문이지요. 인터넷을 검색하여 두 개의 자료를 빌려왔습니다. 하나는 서괘전의 해당 부분이고,
다른 하나는 괘효사(卦爻辭)의 해당 부분입니다.
* 부부도夫婦道 는 오래가지 않을 수 없다. 고로 항恒卦 를 받는다.
항恒 이란 오래가는 것이니 물건이 오래 갈수 없어 고로 둔遯卦 로 받는다.
둔遯 이란 후퇴하는 것이니 물건이 끝까지 후퇴할 수 없어 고로 대장大壯卦 를 받는다.
물건이 끝까지 장성할 수 없어 고로 진晉卦 를 받는다.
진晉 이란 나아가는 것이니 나아가면 반드시 상한다. 고로 명이明夷卦 를 받는다.
이夷 란 상하는 것이니 밖에서 상하는 자는 반드시 집으로 돌아온다.
고로 가인家人卦 를 받는다.
[출처] 주역의 서괘전 상하
주제 : 火地晉卦 - 생명의 약동과 도덕성의 함양
내용 : 덕은 베풀지 않으면 쌓을 방법이 없다. 덕은 다른 사람이 빼앗을 수 없다. 군자는 이익을 가볍게 여겨 득실을 계산하지 않는다. 반면에 소인은 이익을 좋아할 뿐만 아니라 덕 쌓기를 게을리 한다.
이해득실은 소인을 멋대로 춤추게 할 수 있으나, 군자는 득실을 멀리하고 믿음과 덕성을 존중한다. 득실에 매달리지 않고 올바른 정치에 온 힘을 쏟아 부으니 나라에 크나큰 경사가 생긴다
지도자는 잃고 얻음을 초월해야 한다. 득실에 얽매이면 정의와 진리보다는 이익이 판단의 기준이 되기 쉽다. 득실을 벗어나 대도의 정신으로 나아가야 한다. 대도에 들어서는 길에는 문이 없다. 문에 들어서고 들어서지 못하는 것은 득실이 관여하는 것이 아니라, 올바른 마음가짐에 달렸다. 이런 자세로 나아가면 득실의 방어벽은 허물어지기 마련이다.
주제 : 地火明夷卦 - 난세의 성인들의 지혜
내용 : 주역은 싱싱 달리는 인생을 달갑게 여기지 않는다. 오히려 역경과 고난을 이겨낸 인생을 높이 평가한다. 명검이 만들어지기 위해서는 숙련된 대장쟁이와 수많은 담금질이 필요하듯이, 어려움을 극복한 성공이야말로 보람찬 성공일 것이다. 어려움 속에서 불의와 타협하지 않고 정도를 지켜나갈 때, 더욱 그 정도가 돋보인다는 점이 명리괘에 담긴 지혜이다.
명리괘는 위는 땅(地)이고, 아래는 불(火)로서 땅 속으로 밝은 빛이 들어가 어둡고 암울한 모습을 상징한다. 진괘는 땅 위에 밝은 태양이 솟은 것이고, 명리괘는 땅 속으로 태양이 잠긴 형상이다. 태양이 땅 위에 겉으로 드러나느냐 아니면 땅 속으로 감추어졌느냐에 따라서 진괘와 명리괘의 차이점이 부각된다. 진괘를 180° 뒤집어놓으면 명리괘가 된다. 즉 명리괘는 땅 속으로 밝은 것이 들어가 다친(傷: 부상당함) 모양새이다. 이처럼 명리괘는 자연의 변화를 통하여 역사의 흥망성쇄를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출처] 주역에서 정역으로
따라서 ‘화지진도 한다’는 말씀의 뜻은 조선 인민을 지는 해인 일본에게 위탁하는 공사인 동시에, 증산도 추수 말복의 도는 땅 속으로 들어가서 숨는 공사이고, 한겨레에게는 어둠(불가지 ) 속에서 내면을 밝히는 절호의 기회가 됩니다.
따라서 명이(明夷)는 밝음이 손상되는 뜻도 있지만 동이족 한겨레가 내면을 밝힌다는 뜻을 나타내기도 합니다
.
그래서 한겨레는 일제침략 기간 동안 서양문물과 세계정세에 눈뜨면서 민주주의 자본주의 사회주의 사상을 접하게 되고, 민족의식이 깨어나면서 상고시대의 역사를 다시 검토하는 기회를 가졌으며, 이런 상황에서
이 공사에서 결정된 도수대로 삼일독립운동이 일어나게 됩니다. 삼한조선이 부활하는 신호탄이 이 공사로 결정되는 도수인 셈입니다.ㅡ3*1은 삼계문명을 하나로 통일하는 정신의 부활!
* 스물한 사람이라*
이 숫자는 먼저 갑오 동학혁명을 계승하는 의미로 풀이됩니다.
갑삼(甲三) 오칠(午七)의 수를 곱하면 21이 되기 때문이죠.
그리고 이 숫자가 시천주기도주(시천주조화정 영세불망만사지 지기금지원위대강)의 숫자인 점도 주목할 사항입니다.
ㅡ 왜냐하면 삼일운동의 민족대표 33인이 모두 종교인으로 채워졌기 때문이지요. 그리고 기도주의 글자 배치가 ‘6+7+8= 21’인 사실도 중요합니다. 육합, 칠성, 팔괘를 순서대로 나타냄으로 (삼신(甲)과 칠성(午)이 주관하여 재탄생시키는 천�� 법도)를 상징하기 때문이지요.
여기서 우리는 이 공사가 동서양 종교를 통합하여 동이 배달 삼신신교 풍류를 혁신시켜 무극대도를 여는 공사라는 사실을 알 수 있고, ㅡ이 공사의 결과로 정해진 도수로 삼일운동이 일어났음을 확인할 수 있으며, 삼일운동을 이어받아 건국한 대한민국이 곧 후천 대시국(大時國=大始國)임을 알 수 있습니다.
삼일운동이 일어난 1919년이 하느님(1=대시 1년)과 증산 상제님의 탄강일인 9, 19을 나란히 늘어놓은 날자가 되는 것도 우연이 아닙니다.
더구나 기미년은 기유년으로부터 10년째 되는 해로서 무극의 수가 세 개나 모여 있고, 3월 1일은 삼재합일과 삼도합일의 의미를 모두 담고 있으니 더 의심할여지가 없습니다.!
천지부모님 상제님 태모님을 배반하고 자신들의 제국을 건설하려는 반역도인 자칭 천자들의 꿈은 헛꿈 입니다.
많은 도인들이 그런 헛꿈을 꾸는 동안 남조선 사람들은 가난과 폭압과 정신세뇌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대한민국의 국호 뜻대로 후천 대시국이 곧 대한민국입니다.
따라서 참증산 도인들은 지금이라도 모든 종교인들이 연합한 구인일심의 일심자리부터 만들어서 천지부모님의 불안을 해소해 드려야 합니다 !
그 방법도 그리 어렵지 않습니다. 일단 내부적으로 구인ㆍ일심의 자리를 만들고, 외부적으론 증산 상제님의 가르침대로 상대를 앞세워주는 상생의 양보심만 발휘하면 됩니다!
자리탐을 하지말고 성사재인을 먼저 생각하면 일은 저절로 이루어집니다.
*민족대표 33인 [民族代表三十三人]*
민족대표 29인(4명 불참)이 태화관에서 독립선언식을 거행했다.
3·1운동 때 에 서명한 33명의 민족대표. 1919년 2월 초 독립선언에 관한 일을 의논하기 위해 권동진· 오세창· 최린 등이 손병희를 만나 상의한 데 이어, 송진우· 현상윤(玄相允)· 최린· 최남선 등이 독립선언 진행방법 등을 검토, 천도교· 기독교· 구한말의 유지를 조선민족대표로 하여 그 이름으로 독립을 선언하고, 를 각국에 보내기로 결정한 후 서명할 인사들을 찾아 나섰다. 송진우· 최남선은 구한말의 대신들을 만나 상의했으나 성과를 얻지 못해 민족대표에서 그들을 제외키로 했다.
한편 기독교 측은 이승훈, 천도교 측은 최린이 각각 교섭에 나서 많은 동지를 얻었으며, 이를 안 불교 측에서도 한용운· 백용성 등이 가담, 결국 기독교 측 16명, 천도교 측 15명, 불교 측 2명으로 모두 33명이 에 서명키로 하고 총대표에 손병희를 추대함으로써 민족대표 33인이 결정되기에 이르렀다.
김환식 장로 ‘살기가 더욱 어려워지고 있다’고 점잖은 말로 한탄하던 어느 택시 기사의 말이었습니다. 아마도 그것이 정쟁(政爭)에 신물이 난 우리 국민 대다수의 정서일 것입니다. 우리 대한민국의 대통령으로 뽑힌 사람이 공산주의자라고 누가 상상할 수 있고 누가 믿고 싶겠습니까? 오늘 제가 이 자리에 나오기로 수락한 것은 바로 이 자리가 문재인(文在寅) 대통령의 대통령 자격을 검증하고 불필요한 의혹을 뿌리 뽑을 수 있는 절호의, 어쩌면 마지막 기회가 될 수도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다른 데도 아니고 현충일 식사(式辭)에서 문재인 대통령은 6・25 당시 김일성(金日成) 내각의 핵심 인물이었던 김원봉(金元鳳)이 이끌던 조선의용대가 “국군 창설의 뿌리가 되고 나아가 한미동맹의 토대가 되었다”는 말을 했습니다. 망언(妄言)만이 아니라 망발(妄發)이었습니다. 김원봉이 이끌던 조선의용대원을 주축으로 결성된 조선의용군이 북한 인민군의 뿌리가 되었음은 잘 알려진 명명백백한 사실이니 말입니다. 그 자리에 나왔던 전몰(戰歿)장병들의 유족(遺族)은 물론 아직도 6・25의 상흔(傷痕)을 안고 사는 모든 애국시민의 항의가 거세게 일자 청와대는 김원봉에게 독립유공자로 훈장을 추서(追敍)하려던 보훈처의 계획에서 일단 발을 빼는 것으로서 재빠른 진화에 나섰습니다. ‘애국 활동을 평가하는데 보수와 진보를 가릴 필요가 없고 사회통합을 이룩하겠다는 취지에서 나온 발언이었을 뿐이니 김원봉에 대한 서훈 추서 계획을 유보하는 것으로 현충일 추념사 논란은 접고 넘어가자’는 것이 청와대와 여권(與圈)의 입장입니다. 정치가 시끄럽지 않고 경제가 다시 활성화되기만 바라는 많은 서민도 그 입장에 동의할 수 있을 것입니다. 仁村은 親日派로 몰면서 附逆者는 敍勳 하지만 그것이 과연 이 나라를 위해 현명한 일이겠습니까? 대통령의 현충일 망언이 단지 우발적인 실수였다고 볼 수 있습니까? 만약에 그것이 대통령의 국가관(國家觀)・역사관(歷史觀)을 그대로 반영하는 것이었다면 지금 우리 대한민국은, 아니 어느 때 어느 나라라도, 그런 문제를 그렇게 안일하게 처리하고 넘어갈 여유는 없습니다. 막강한 권력을 가진 대통령의 국가관이나 역사관과 시국관은 바로 그 나라의 운명, 곧 그 나라 국민들의 삶과 죽음, 자유와 노예화의 갈림길을 좌우하는 방향타(方向舵)가 되는 까닭입니다. 6・25전쟁의 원흉(元兇) 중 한 사람이었던 김원봉을 대한민국의 애국 서훈 대상으로 치켜세우는 대통��의 인식과 발언을 그간의 역사 관련 다른 발언들과 연계하여 볼 때, 그것이 결코 우발적 실수가 아니었음이 드러납니다. 문재인 대통령은 취임 전부터 대한민국이 1948년 8월 15일에 독립한 자유민주공화국임을 부정하는 입장을 표명하곤 했습니다. 대통령이 되고서는 1919년 4월에 상하이(上海)에서 통합 임시정부를 선포한 것이 대한민국의 건국이었으니 올해를 건국 100주년으로 북한과 함께 크게 기념해야 한다고 대대적으로 선전하더니, 북한조차 임시정부를 독립정부로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을 감지했는지 뒤늦게 슬그머니 꼬리를 내리고 3・1운동만을 강조하는 쪽으로 기울기도 했습니다. 그러면서도 공산주의 활동 때문에 서훈 대상에서 제외되었던 인물들, 예를 들어 손혜원 의원의 아버지같이 부역자(附逆者) 경력이 뚜렷한 사람들에게도 훈장을 주는 일에는 계속 적극성을 보였습니다. 그와 반면에 1948년 8월에 새로 독립한 대한민국 건국과 발전에 큰 공로를 세운 인촌 김성수(仁村 金性洙) 같은 경우는 일제(日帝) 식민지 시대의 활동을 문제 삼아 친일파(親日派)로 몰고 서훈 취소는 물론 다른 여러 가지 방법으로 모든 명예를 박탈했습니다. 심지어는 수십 년간 학생들이 자랑스럽게 불러온 교가를 작곡한 현제명・이흥렬・김성태 같은 작곡가들까지도 친일로 몰아 교가(校歌)마저 버리도��� 만드는 역사 파괴적 ���업이 추진되고 있습니다. 일제의 감시와 압박 속에서 전문인으로서 어렵게 살아남으며 젊은이들에게 음악이라는 은유적 수단을 통해서라도 애향(愛鄕)・애교(愛校)・애국 기상을 심어주려던 노력의 흔적마저 친일행위로 모는 행위들이 대통령이 그처럼 높이 외쳐대는 사회통합의 취지에 부합되는지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역사바로잡기’ 구실 아래 사회 분열시켜 일제의 탄압에서 벗어나기 위해 독립운동을 한 경력을 평가하는 일에서 좌우 이념적 성향을 따질 필요가 있느냐라는 말은 한편 온당한 이야기입니다. 사람의 행적은 시기별로 그것 자체로서 밝히고 평가해야 합니다. 독립운동가들 가운데는 좌익이 많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해방 직후 이승만(李承晩) 박사도 조봉암(曺奉岩)・박헌영(朴憲永) 등 공산당 활동 경력이 있는 차세대 정치인들에게도 나라를 세우는 일에 손을 잡자고 제의했고 상당 부분 성공했습니다. 조봉암을 기용하여 농지개혁을 추진한 것이 좋은 예입니다. 하지만 일제가 패망한 후까지도 공산주의를 포기하지 않고 희대의 전체주의 독재자로 판명 난 스탈린의 전 세계 공산화 전략의 도구가 되기로 결심한 사람들과 손을 잡고 나라를 세운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공산권에 편입되었던 동유럽 국가들의 역사가 이제 다 증명해주고도 남듯이 공산주의자들에게는 모스크바의 공산당 당중앙(黨中央)에 대한 충성과 복종이 국가와 민족에 대한 충성이나 배려에 우선한다는 것이 철칙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불행히도 문재인 대통령과 그를 둘러싼 사람들은 그러한 사실을 모르거나 애써 외면하려 합니다. 우리 애국지사들이 반공(反共)정책을 채택한 이유가 진정한 독립을 달성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마치 평등의 이념을 외면하기 때문이었는 듯 착각 또는 오도(誤導)하며 자유와 평등, 진실과 정의가 자유민주주의 체제의 이상(理想)이요 출발점이었다는 사실을 부정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반공정책을 추진했던 사람들, 예를 들어 이승만이나 박정희(朴正熙) 대통령, 그리고 그들에게 협조했던 사람들에 대해서는 가혹하기 짝이 없는 평가를 하고, 그들에 관한 사실적 조명조차도 ‘친일미화’니 ‘독재미화’니 하는 선동적 구호로 매도하며 금기시하고, 초기부터 대한민국 건국과 발전에 크게 공헌했던 사람들은 거의 모조리 ‘친일파’로 낙인찍어 민족의 기억 속에서 추방시켜나가고 있습니다. 김원봉의 행적에 대해 보이는 관심과 관용적 태도의 극히 일부만이라도 역사적 인물들 모두에게 고루 할애한다 하면 지금 친일로 매도당하는 인물들 상당수가 사실은 견디기 어려운 탄압 속에서도 민족을 잊은 적이 없는 불우한 애국자들이었다는 사실이 밝혀질 것이고, ‘역사바로잡기’라는 구실로 사회를 이토록 분열시키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국제관계에서도 드러나는 무지와 편파성 역사 인식에서 드러나는 무지나 심각한 편파성은 개인에 대한 평가뿐 아니라 국제관계에서도 마찬가지로 나타납니다. 35년간의 일제 식민통치, 그중에서도 강제징용이나 종군위안부 문제 등은 영구(永久)한 성토(聲討)의 대상이 되고 해방된 지 70년이 넘은 지금까지도 친일파 청산의 불철저함이 마치 모든 정치・도덕 문제의 근원인 듯 호들갑을 떨면서도, 수천 년에 걸쳤던 중국과의 불평등 관계에서 우리가 당했던 수모가 어떤 것이었던가는 까맣게 잊고 생각조차 해보지 않습니다. 유엔은 남북한 동시의 인구 비례 국민선거로 우리 민족이 통일 국가로 독립할 수 있도록 기회를 마련해주었지만 그 절호의 기회를 소련과 소련의 사주를 받던 김일성의 반대 때문에 놓쳤는가 하면, 6・25전쟁 당시 우리 국군과 유엔군이 혈투를 벌이며 압록강까지 진출하여 38선을 없애고 한반도를 대한민국의 깃발 아래 통일할 수 있는 가능성이 열렸었지만, 도둑처럼 스며들어 인해전술(人海戰術)을 편 중공군의 개입으로 우리 대한민국 중심의 통일이 좌절되었다는 뼈아픈 역사적 기억은 완전히 외면하고 있습니다. 무장침입으로 우리의 통일을 가로막았던 중공군이 뿌리인 오늘의 중국이, 우리에게 미안하다고는 못할망정 과거 자기들의 적대적 행적을 상기시키는 ‘파로호(破虜湖)’라는 이름이 거북하니 바꾸라고 감히 내정(內政)간섭적인 오만한 요청을 해도 문재인 정부는 항의조차 못 합니다. 역으로 일본을 패배시켜 우리의 해방을 가져오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하고, 김일성의 침략전쟁에서 대한민국을 위해 함께 싸우며 피를 흘렸고, 전후(戰後) 복구를 위해 엄청난 물질적 원조까지 해준 혈맹(血盟) 미국은 제국주의 세력이라고 매도하고, 서로 간의 많은 노력을 거쳐 드디어 우호적 협력관계를 유지할 수 있게 된 일본과는 거의 고의적(故意的)으로 관계를 악화시킴으로써 대한민국의 국제적 입지를 계속 악화시키고 있습니다. 무지인가, 도발인가 문재인 대통령과 그 측근들 사이에서 역사적으로 관대한 평가를 받는 인물이나 국가들은 모두가 공산주의 과거를 지닌 존재들이라는 사실을 주목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모두가 대한민국이 독립국가로 태어나는 데 적극 반대했을 뿐 아니라 대한민국 주도로 통일국가가 되는 것을 군사개입을 해서까지 적극 방해한 세력들입니다. 러시아는 공산주의를 버렸지만, 중국은 아직도 정치적으로는 공산당이 지배하는 국가이며, 북한은 대한민국 체제의 혁명적 전복(顚覆)이 자기들이 추구하는 목표라는 사실을 공공연히 천명하고 지금까지도 그것을 철회한 일이 없습니다. 김일성은 더구나 민족통일이라는 미명(美名) 아래 처음에는 스탈린까지도 주저하던 남침 전쟁을 도발함으로써 민족역사상 가장 피해가 컸고 치유가 어려운 동족상잔(同族相殘)의 재앙을 초래했던 인물입니다. 그런데도 지금까지 드러난 문재인 대통령의 평화외교 정책의 기조란 핵(核)을 가진 북한과의 무조건적 평화, 미국과 유엔이 촉구하는 북한의 비핵화(非核化)가 아니라 한반도의 비핵화라 보입니다. 곧 미국이 우리에게 제공하고 있는 핵우산의 철거, 다시 말하면 미군 철수를 전제로 한 우리 민족끼리의 통일이라는 것밖에 다른 것이 없는 듯 보입니다. 북한의 적대적 자세에는 변한 것이 없는데 이번 현충일 추념사에서 대한민국 대통령은 6・25전쟁에 관한 공로로 김일성에게서 훈장까지 받은 김원봉을 해방 전에 중국에서 조선의용대를 이끌었다는 이유로 우리 국군의 뿌리를 마련한 애국자로 치켜세운 것입니다. 설사 통일이 된 후라도 용납될 수 없는 역사 왜곡입니다. 이제 남은 질문은 간단합니다. 전혀 단순하게만 볼 수는 없는 현충일의 김원봉 미화 발언이 무지에서 나온 실수인가 아니면 국민의 애국 의식의 수준을 가늠하기 위한 의도적 도발이었는가 하는 것입니다. 문재인 대통령은 “〈암살〉이라는 영화를 보고 김원봉에게 훈장을 수여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고 전에도 말한 적이 있습니다. “영화를 보고 충격을 받아 원자로를 폐기하겠다는 생각을 했다”는 것과 비슷한 맥락의 이야기입니다. 영화에서 받는 인상을 역사적 진실로 착각하며 거기에서 촉발된 감흥을 곧바로 실천으로 옮기는 일에 대통령이 가진 막강한 권력을 동원한다는 발상 자체가 이 나라의 주인으로 납세자(納稅者)인 국민의 입장에서 볼 때는 기가 막히는 일입니다. 그것이 만약에 단순 무지에서 발생한 일이었다면 적어도 도덕적으로 용서받을 수 있는 여지는 있습니다. 이번 현충일의 발언이 특히 충격적이었던 것은 바로 전몰자의 묘소와 유족들 앞에서 전쟁의 원흉을 칭찬하고 더구나 그들이 몸담았던 군대의 창시자라고 치켜세웠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만약에 사실을 알고도 그런 짓을 했다면 그것은 정치나 이념 이전에 인륜(人倫)을 무시하는 행위이며, 호국영령은 물론 6・25의 후유증을 아직도 심히 앓고 있는 대한민국 국민 전체에 대한 배신이요 모욕이기 때문에 용서가 어려울 것입니다. 침략 원흉이 대한민국 애국훈장감이라니… 아무리 적이었다 하더라도 그가 훌륭한 군인으로서 본분을 다하다가 희생당한 경우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의 공군 명수였던 로젠 남작을 위해 오스트레일리아가 조촐한 군인장(軍人葬)을 치러주었듯이, 적진에서라도 인간적으로 대우하는 것이 문명사회의 예의입니다. 하지만 이 나라를 등지고 적진으로 들어가 민족의 대재앙이 된 전쟁을 일으키고 수행하는 데 공로를 세워 훈장까지 받은 사람을, 그 전쟁의 희생자들 영령과 유족들 앞에서 우리나라의 애국훈장감으로 치켜세울 수는 없습니다. 6・25전쟁으로 엄청난 희생을 당하면서도 나라의 공산화를 막아낸 앞선 세대의 애국심 덕분에 대한민국이 보장해주는 평화와 자유와 번영의 혜택을 모두 누리면서도, 역사공부를 게을리했기 때문에 고마움을 모르는 후속세대의 이기적 무관심과 무지 때문에 이런 불상사가 벌어진 것이며, 그것은 언제인가는 혹독한 대가를 요구받을 수 있는 무지와 무관심이라는 사실을 상기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러한 지불요구서는 어쩌면 이미 도착하기 시작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대통령의 현충일 망언이 보좌진의 실수에서 나온 일이고 잘못되었음을 인정한다면 해당 보좌진은 마땅히 문책당해야 하고 그들이 가지고 있는, 아니 문재인 정부가 공유하고 있는 역사인식이 바로 된 것인가에 대해서는 진지하고 처절한 반성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국제사회에서, 특히 6・25전쟁에 참전했던 16개국 우방의 견지에서 보더라도, 대한민국의 대통령이 주적(主敵)이었던 북한 인민군 창설의 주역이요 대남(對南) 침략전쟁을 도발하고 지휘한 원흉의 한 사람이었던 김원봉을 바로 대한민국 군대의 뿌리요 한미(韓美) 동맹의 토대라고 말했다는 것이 얼마나 어이없는 일이겠습니까.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직후부터 독일과 우호적 관계를 맺고 지내는 서방의 자유민주주의 국가들이지만 그 수반들은 노르망디상륙작전 75주년을 맞았을 때는 독일군에 희생당한 전몰자들을 기리기 위해 모두 모여드는 모습을 보지 않았습니까? 대통령은 대한민국을 어디로 끌고 가나? 어느 경우에라도 이번의 현충일 망언은 대통령이 국민 앞에서 진정으로 사과하는 일 없이 김원봉 한 사람에 대한 서훈계획 일시 취소로 넘어갈 일은 아닙니다. 이제 국민이 알고 싶어 하는 것은 대통령의 역사인식과 국가의식이 어떤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문재인 대통령은 듣기 좋은 아름다운 말을 하는 데는 귀재이고, 그런 추상적 언어로 국제사회에도 진정한 민주주의 수호자로서 자기의 이미지를 심는 데 지금까지는 일정 정도의 성공을 거두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말과 그의 행동은 정반대 방향으로 간다는 것이 이제는 국내뿐 아니라 국제사회에서도 서서히 감지되고 있습니다. 문재인 대통령이 ‘김정은의 수석대변인’이라는 말까지 나오는 배경이 그것입니다. 한두 사람을 오랫동안 속이거나 많은 사람을 일시적으로 속일 수는 있어도 모든 사람을 영원히 거짓 속에 가두어 둘 수는 없습니다. 이제는 우리 대한민국 국민도 정확하게 알고 싶어 합니다. 문재인 대통령은 지금 대한민국을 어느 방향으로 끌고 가려 하는 것입니까? 그것이 진정 대한민국 국민 절대다수의 안녕과 이익의 극대화(極大化)를 염두에 둔 길이라고 국민 절대다수가 동의합니까? 평양에 갔을 때는 왜 ‘대한민국 대통령’ 대신 ‘남측 대통령’이라는 칭호를 쓴 것입니까? 통일도 우리 대한민국 중심으로, 우리 국민이 누리는 평화와 자유와 권익을 증폭시키고 나아가 북한에 사는 동포들도 우리처럼 자유와 번영의 혜택을 누릴 수 있도록 돕기 위해 하려는 것이지, 우리가 가진 것을 핵무기를 휘두르는 김정은의 요구대로 내어주며 우리나라가 북한을 닮은 사회가 되는 것을 무릅쓰고라도 통일을 하자는 것은 결코 아니지 않습니까? 만약에 이번 일에 대해 대통령이 직접 국민 앞에 사과하기를 거부한다면 그것은 망언의 심각성을 깨닫지 못하고 반성을 거부한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렇다면 그것은 건전한 상식이 있고 나라를 걱정하는 모든 사람에 대한 도전입니다. 보수와 진보, 촛불과 태극기, 여(與)와 야(野) 가릴 것 없이 이성적 사고(思考)의 능력을 가진 사람이라면 국가와 반(反)국가, 애국과 반역 사이의 갈림길이 무엇인가 하는 질문을 던지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을 만드는 어리석은 처사라고 생각합니다. 대통령의 사과가 수반되지 않은 김원봉 서훈 계획의 취소는 유권자들의 표심을 의식한 일시적인 후퇴일 뿐, 진정한 반성이 수반되는 입장 취소가 아니라고 의심받기에 충분합니��. 현충일 추모사 사건이 터지기 전부터도 국민 여론은 내란을 걱정할 정도로 심각하게 분열되어 있었습니다. 문 대통령은 사회주의 혁명을 주도하고 있는 것인가 하는 의혹이 일면서 대통령 탄핵 이야기까지 솔솔 나오고 있습니다. 문 대통령이 입으로는 화합을 말하면서도 실제로는 대한민국의 애국 시민이라면 묵인할 수 없는 행동을 보이고 있기 때문에 분열이 생기는 것이고, 이번 현충일 사건은 그 단적인 본보기입니다. 국민은 ‘혁명’을 원했나? 하지만 탄핵은 한 번만으로도 이 나라 국민이 감당하기에 벅찬 불행을 낳았습니다. 제발 그런 일이 재발되어 ‘적폐청산’이 꼬리를 물고 일어나 결국은 사회 전체가 사람 살기 어려운 곳으로 황폐화되는 일이 없도록 지금이라도 대통령이 국민의 목소리를 경청하며 나라 운영의 방향을 바로잡아 주기를 바랍니다. 나라 사정이 크게 잘못되어 있는데 그것이 바로잡힐 기미가 보이지 않을 때는 밑으로부터의 대중혁명이 터져 나올 수도 있는 것이 역사의 이치입니다. 혁명은 기득권 세력이 지나치게 이기적이고 무능하며 계층적으로 굳어져 있어 필요한 개혁을 제때에 하지 못할 때 발생하는 내란(內亂) 현상입니다. 문재인 정부와 그 지지세력은 자기들이 ‘촛불혁명’으로 태어난 세력임을 자처하며 촛불의 이름으로 ‘적폐청산’을 추진하고 대북(對北)관계・대미(對美)관계 모든 면에서도 그전까지 이 나라 정부가 추진하던 정책 노선을 뒤집을 권리가 있는 듯 행동합니다. 하지만 대한민국 국민 전반은, 촛불시위에 참석했던 사람들까지도, 지금의 정부가 ‘혁명’정부라는 것을 감지하지도 못하고 인정하지도 않습니다. 왜냐하면 최순실 사건으로 국민이 충격을 받고 거리로 쏟아져 나왔을 때도, 그들은 대통령이 최순실 같은 수준의 사람에게 휘둘렸다는 소문에 분개를 하고 수치심을 느꼈기 때문에 대통령 하야(下野)를 외쳤던 것이지 우리 대한민국에 혁명, 더구나 사회주의 혁명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여 들고일어난 것은 아니었습니다. 문재인 대통령 후보의 선거 공약에서도 ‘제왕적 대통령 권한’을 축소하고 정부와 국민 간에 소통이 활발한 진정한 의미의 민주주의를 실천하겠다는 약속이 유권자들의 지지를 이끌어냈지, ‘적폐청산’이라는 명분 아래 대한민국의 헌법적 토대를 흔들어 댈 것을 상상한 국민은 별로 없었습니다. 대한민국은 혁명이 필요한 나라가 아니었다 모든 전문가의 반대를 무릅쓰고 반 (反)원전 정책을 밀어붙여 에너지 산업을 공황으로 몰아넣고, 소득주도성장 정책을 무리하게 고집하여 중소기업과 자영업을 결딴내고 실업자(失業者)를 양산(量産)하며 빈부(貧富) 간 격차를 오히려 증폭시킬 것이라는 것은 상상 밖이었습니다. 북한의 비핵화와 남북 간 평화 관계 구축이라는 미명 아래 대한민국의 안보체제와 그 버팀목이었던 한미동맹을 약화시키고 대일관계를 파탄으로 몰고 감으로써 2년 사이 우리 한국이 다시 구한말(舊韓末)처럼 국제사회에서 도외시 당하는 미아(迷兒)처럼 되어버린 것이 ‘촛불혁명’ 2년간의 결실 아닙니까. 이런 결과를 예상하며 태극기로 대통령 탄핵만은 막으려 했던 태극기세력은 말할 것도 없고 촛불시위에 참가했던 국민 절대다수도 ‘혁명’, 곧 대한민국 체제의 전복을 염두에 두고 반(反)박근혜 항의 시위에 참가했던 것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최순실 사건 발발 전야의 대한민국은 여러 가지 부족함과 어려움은 안고 있었지만, 민주화되어 평화적으로 정권교체가 이루어지고 경제・사회・문화의 발전에도 성공하여 세계인의 호의적 주목을 받는 나라였지 혁명이 필요한 나라가 결코 아니었습니다. 국민이 바라던 것은 권력이 좀 더 도덕적으로 책임질 줄 아는 사람들의 몫이 되어 국정이 좀 더 효율적으로 운영되기를 바라던 것뿐이었습니다. 그것은 혁명으로 해결될 성질의 문제가 아니라 도덕적・지적(知的) 각성을 요구하는 어려움들이었습니다. 다만 북한의 선동선전에 일찍부터 노출되어 ‘대한민국은 태어나지 말았어야 할 나라’이고 북한과의 무조건 통일만이 우리 민족의 살길이라고 세뇌당했던 몇몇의 자칭 ‘혁명적 전위대원(前衛隊員)’들이 촛불의 평화롭고 아름다운 영상에 현혹된 다수의 선량한 국민을 선동하여 평화적 정권교체라는 민주화 투쟁의 소중한 결실을 짓밟고 촛불 ‘혁명’ 권력을 탄생시켰던 것입니다. 문재인은 솔직해야 하지만 이제 문재인 대통령은 세계 앞에 우리를 대표하고 이 나라의 운명을 결정할 수 있는 위치에 서 있는 책임자입니다. 대통령이 잘 해야 우리 국민의 국익(國益)이 수호될 수 있습니다. 이제 문재인 대통령에게 강력하게 요청해야 합니다. 현충일의 망언이 실수였다는 것을 안다면 국민 앞에 직접 나와 정중히 사과하고 용서를 구함으로써 나라가 둘로 갈라지는 것을 막고 대한민국 대통령으로서의 정통성을 다시 확인받으십시오. 아니면 문재인 정부가 추구하는 ‘촛불혁명’의 목적이 우리 대한민국의 헌법정신과 이상, 곧 국민 전체의 자유와 평등에 기초한 정의와 번영인지 아니면 ���존의 기득권세력은 모두 제외한 나머지만의 계급적 권력 확보와 궁극적으로는 북한과의 무조건 통일인지에 관해 불안해하는 많은 국민의 의혹에 대해 솔직하게 대답하십시오. 그리고 우리와 이상과 이념을 같이해온 혈맹일 뿐 아니라 세계 제일의 패권(覇權)국가인 미국과의 동맹관계를 파탄시키고 일본과 등을 지며 중국과 러시아의 비호 속에서 북한에 흡수통합되어 중국이나 북한과 유사한 사회가 되는 것이 우리 국민이 진정으로 원하는 길인가에 관해서도 국민의견을 성실하게 타진해보십시오. 그것이 진정한 민주주의 국가의 대통령이 할 일이고, 자기들이 추구하는 ‘혁명’에 관한 그 정도의 솔직함은 혁명세력임을 자처하는 사람들이 갖추어야 할 역사에 대한, 인민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입니다. 그것을 위반한 대가는 상상을 초월하게 가혹한 결과로 우리 민족 모두에게 닥쳐올 것입니다. 김원봉의 前轍을 밟을 것인가? 아무리 청년시절 애국투쟁에 기여했다 하더라도 스탈린의 세계공산화 전략의 도구가 되기로 자원하여 김일성과 함께 동족상잔의 침략전쟁을 일으켰고 그 보상으로 북한의 훈장까지 받았던 김원봉을 대한민국의 영웅으로 받들려는 사람들은 김원봉과 똑같은 운명을 맞을 것을 각오해야 할 것입니다. 민족해방이나 프로레타리아 혁명을 구실로 민족에게 용서 못 받을 죄를 진 후 자기 자신도 결국은 잔학한 숙청의 대상이 된 그런 운명 말입니다. 김원봉 같은 인간들에게 맞서 우리가 피와 땀과 눈물로 지켜온 것이 바로 생명보다 소중한 자유이며, 숙청을 빙자한 보복정치가 용납되지 않는 진정한 의미의 민주주의입니다. 문재인 대통령은 지금이라도 대한민국의 애국 국민 앞에 직접 사죄하는 모습을 보임으로써 나라를 내란에 버금가는 갈등에서 구하고 자신도 김원봉의 길을 가게 되는 운명을 피하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더 이상 악의 확대 재생산을 바라보고만 있을 여유가 없습니다. 애국애족을 빙자한 피의 악순환에서 벗어나 진정한 국민통합을 토대로 하는 민족통합과 인류 전체의 평화적 공존, 공생을 위해 지혜를 모을 때입니다.(끝) 2019-8-13
另外,我們還舉辦攝影書的國際紙上派對,邀集多位評論人、出版人、收藏者等來自世界各地的攝影專業讀者——飯澤耕太郎、朴智洙、言由、李錦麗、Daniel Boetker-Smith、Dieter Neubert和Larissa Leclair,與大家一起分享他們近期最喜愛的攝影讀本;當然,我們也沒忘了和大家一起去逛逛熱絡的國際藝術書展,感受此刻正在全球爆發的製本風潮與書展氣氛。同時,我們也新開啟「攝影書製作現場」系列,首集介紹在紐約從事獨立出版的Session Press攝影書企畫項目,其後將陸續從攝影書的編輯設計、印刷工法乃至品牌經營流通等環節,推出線上專業工作者的訪談,敬請期待。在「論影像」專欄,則挖掘了出版於1895年台灣受日本殖民統治開端之際、由英國人George U. Price拍攝的《北福爾摩沙的回憶》(Reminiscences of North Formosa),這是目前所知最早以「台灣/福爾摩沙」為名出版流通的攝影輯冊,在精煉的影像中,藉北台灣的茶業生態,書寫著面對不明未來的島嶼紀事;除了張世倫對這份珍貴影像史料的精彩分析,我們也將全書重新編輯作為附錄別冊,使讀者能一探其貌。
As a form of creativity, books have become the single most important topic in the field of contemporary photography. Looking back, we first spoke about the self-publishing movement that was just unfolding in the inaugural issue of Voices of Photography in 2011. Several years later, this publishing wave has been raging and leaving its mark all around the world. Even though paperback publishing is thought to have entered its dying phase in this century, the burning flames of the photobook wave shows no signs of letting up. Nowadays, small international independent publishers have sprung up all over the world and art book fairs have bloomed. Photobooks are now the centerpiece of photography festivals, expos and creative competitions, becoming a special sight unique to this journey of development of photography and redefining the role and concept of “book-making”.
This is the golden age of photobooks. We have been watching closely the reading and publishing of imagery in Taiwan and since our inaugural issue, we have done photobook features every two years, keeping a record of the photography publishing landscape in Taiwan as an observation of image culture. This time, we had put out another open call for Taiwanese photography publications from 2016. We received more than a hundred contributions, a huge jump in numbers from before, flooding our editors’ room. In this issue, we are featuring many interesting publications, and have also invited designer Chia-Hsing Ho and art critics Manray Hsu and Shih-Lun Chang for a dialogue to discuss the current developments in regards to Taiwan’s photography publications.
In addition, we are throwing an international photography party on paper as we bring together critics, publishers and collectors from all over the world – Kotaro Iizawa, Jisoo Park, Yanyou Di Yuan, Gwen Lee, Daniel Boetker-Smith, Dieter Neubert and Larissa Leclair – to share their recent favorites in photography publications. Of course, we have not forgotten to bring our readers on a trip to boisterous international art book fairs for a real feel of the book-making trend that is exploding across the world, as well as soak in the atmosphere at the book fairs. At the same time, we are introducing a new “Photobook Making Case Study” series and in the first installment, we are featuring photobook projects from Session Press, an independent publisher based in New York. Subsequently, we will introduce the different aspects of photography publication such as the editorial designing of photobooks, printing methods, and even branding and supply chain management. Do also look forward to interviews with professionals in the industry in future issues. In “On Images”, we unearthed “Reminiscences of North Formosa”, a photobook authored by Englishman George U. Price, published in 1895, just as Taiwan came under Japanese rule. This is the earliest known photobook using the name “Taiwan/Formosa” and which was published and circulated. The slick images set against the background of Taiwan’s tea industry chronicle the happenings on this island facing an uncertain future. Apart from Shih-Lun Chang’s impressive analysis of this precious historical imagery data, we have also re-compiled the entire book and included it in this issue as a supplement volume for our readers.
In this issue’s “Artist Showcase”, we are introducing new photography works by Japanese artist Miwa Yanagi while looking back at her creative journey since the 1990s. We also have a special feature on the late photographer Masahisa Fukase’s dramatic life in photography, penned by Tomo Kosuga, Director of the Masahisa Fukase Archives. In addition, we pay tribute to the late Chinese publisher De-Jian Yin, who passed away earlier this year, as we reflect on his dedication to the publication of photography.
We would like to express our gratitude to all the artists who have shared their works with us for this issue. As VOP enters its seventh year, we are honored to be awarded the Golden Tripod Award (Humanities and Arts Award in the Magazines Categories) again as we continue pushing forward on this road of image publication. A big thank you to all our readers out there who have been marching alongside u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