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umgik
movejeru-blog · 7 yea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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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즈망가 대왕>이라는 만화를 본 참이다. 이 만화는 마치 케릭터를 강조하기 위해 정교하게 고안돼 작동하는 기계 같다. 케릭터가 강조되기 위해서는 이야기를 구성하는 다른 요소가 한층 물러나야 한다. 케릭터가 이야기의 가장 전면에 나서는 동시에 다른 요소는 후면으로 빠져야 한다. 단순히 노출의 빈도 때문에라도 단일한 사건보다는 복수의 에피소드가 필요하다 하겠다. 산만해질 위험이 큰 복수의 에피소드를 하나로 엮는 배경으로써 ‘학교’라는 설정은 기능한다. 동시에 소재를 제공한다(거의 마를 일이 없다). 자동화. 이 정도의 자동화 설비, 자동화 회로를 갖춤으로써 이 만화는 훌륭히 작동한다. 아, 빼먹었다. 가장 중요한 요소. 각각의 케릭터들. 그러니까 토모, 오사카, 사카키, 치요, 미요, 카구라, 유카리, 쿠로사와, 키무라 말이다. 외워버렸어. 자, 나는 지금 등장 케릭터들을 쭉 나열했는데, 나열할 수 있다는 사실이 이 만화의 성격을 말해준다 하겠다. 4권짜리 만화를 읽으며 나는 이따금 속으로 케릭터들의 이름이며 성격 등을 외우곤 했단 말이다. 어쨌든 이 케릭터들은 매끈한 회로 안에서 움직이는 분자 같다. 이런 자동화 설비는 좀더 큰 차원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1권을 읽을 때 우리는 학생들이 1학년이라는 것, 열두 개로 나뉘는 소챕터가 1년의 열두 달로 나뉜다는 것을 알게 되고, 2권에서 학생들이 2학년으로 진학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이 만화가 언제 어떻게 끝날지 알게 된다. 이때 각 시기마다 실제 고등학교와 고등학생이 시행하고 수행하는 의제가 소재로써 주어진다. 중간고사, 수학여행, 축제, 운동회, 입시 등. 그래서 이런 절차가 2권, 3권, 4권 내내 반복되는 것이다. 따라서 두번째, 세번째 거듭해 같은 소재가 나왔을 때 자연스레 그 이전에 소재가 제시되었던 순간이 환기된다. 아 1학년 학교 축제 때 그랬지! 2학년 중간고사 때는 어땠더라? 하면서. 학교를 벗어나서도 마찬가지다. 1월에 한 해의 안녕을 기원하는 세시풍속 행사, 치요의 별장으로 떠나는 여름 여행 같은. 그런데 이때 눈 여겨 보아야 할 점은 이 만화에서 자동적으로 주어지는 소재들이 말 그대로 소재로써만 기능한다라는 사실이다. 아니, 그렇게 기능할 수밖에 없다. ‘4컷만화’라는 형식 때문이다. 애초에 만화의 목적이 아니기도 하지만, 특정 ‘소재’가 갖는 성격이나 의미, 소재와 케릭터와의 상호작용을 4컷에 담기는 무리다. 이는 케릭터 사이에서의 상호작용에 있어서도 똑같이 작용한다. 주요 케릭터는 다 친구 사이고, 그 사이, 그 관계에 변함이 없다. 끝까지 간다. 여자 고등학생이 등장하는 만화임에도 남학생과의 연애 묘사가 없다, 그런 점에서 장르의 관습을 깼다라는 기존의 해석은 약간 핀트가 엇나간 듯한데, 연애를 타인과의 관계 정도로 말할 수 있다면, 이 만화는 ‘타인’이나 ‘관계’에는 관심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남학생과의 연애담이 없다는 것은 그것을 목적으로 했다기보다는 부수적인 효과 혹은 별 볼 일 없는 결과에 가깝다. 4컷만화라는 형식은 다른 요소를 억누르고 케릭터를 쥐어짜낼 수 있는 가장 첨예한 설비로 기능한다. 그 좁은 공간, 크기까지 동일한 네 공간에서 운신의 여지란 없다. 신사에 참배한다는 의미. 오키나와의 미묘한 이국성. 끊임 없는 시험과 대학 입시의 굴레. 이런 게 비집고 들어올 틈은 없다. 비집고 들어온다. 이 말은 틀렸다. 신사, 오키나와, 대학 입시는 애초에 동인이 아니라 설비니까. 붙박이장이나 보일러는 움직이지 않잖아. 같은 말이 반복되고 있다. 이 글이 끝나야 한다는 징조. 어쨌든 남는 건 케릭터 뿐. 오직 케릭터 만이 그 공간에 들어간다. 이제부터는 다소 막무가내 개드립과 액션이 난무한다. 이때의 드립이니 액션이니 하는 것이 반복되면서 케릭터를 형성한다. 이 케릭터를, 케릭터 만을 선보이는 것이 이 만화의 목적이다. 오사카라는 케릭터는 가장 막무가내인데, 그것은 녀석의 케릭터성이면서 역할처럼 느껴진다. 1월 챕터에서 신년 참배를 갔다거나, 8월에 치요의 별장으로 여행을 갔다거나 했을 때 다른 케릭터는 그 주어진 설비 내에서 운동한다. 이 주어진 설비를 컨셉이나 테마라고도 부를 수 있을 것 같다. 그런데 오사카 녀석은 해당 챕터의 테마를 너무나 자주 이탈한다. 다른 녀석들은 어쨌든 주어진 테마를 기조로 해 아주 조금이나마, 아주 느슨하게나마 관련된 망에서 힌트를 얻어 움직인다면 오사카는 전혀 그것을 따르지 않고 리듬을 원천적으로 끊어버린다. 이 만화는 극단적인 설비와 형식을 취하기 때문에 독자는 금세 패턴을 알게 되고 지루해질 수 있는데, 그러한 불상사를 어느 정도 상쇄하는 장치 또한 갖추고 있다. 오사카의 4차원성은 그런 장치로 기능한다. 사카키는 이 만화가 한창 인기를 끌었을 때 가장 인기를 끈 케릭터였을 것 같다. 적어도 그렇게 의도된 케릭터다. 사카키는 고양이를 좋아하고(이것의 사카키의 케릭터성 중 하나다), 거리에서 고양이를 자주 마주친다. 거리에서. 즉 사카키의 동선도 해당 챕터의 테마와 상관 없이 가끔은 독자적이다. 이로써 고양이를 좋아한다는 사카키의 케릭터성이 강조되고, 결과적으로 이것은 사카키라는 케릭터 자체를 드러낸다. 이 만화의 케릭터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외관을 하고 있는(이 역시 사카키의 케릭터성이다) 사카키 말이다. 그런데 사카키는 학교 안에서는 과묵하고 차가운 인상을 풍긴다. 이것 역시 사카키의 케릭터성이라면 그런 사카키가 고양이를 좋아한다는 케릭터성은 보다 강조되는 것이다. 어느 모로 보나 사카키는 스포트라이트를 듬뿍 받는 케릭터다. 치요는 가끔씩 이야기를 느슨한 정도로 정리하고 조율하는 내레이터다. 오사카와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만화의 단조로움을 해결하는 역할. 단조로움의 해결은 작화 차원에서도 진행되고 있다. A와 B가 A의 오버 더 숄더 쇼트로, 즉 A가 전경에, B가 A의 시선에서 대각선을 그리며 후경에 위치해 있다. 다음 장면에서는 이 구도가 뒤집히곤 하는데, 이 뒤집히는 패턴은 꽤 다양해서 일일이 적기 귀찮다. 그리고 이 다음 장면에서는 C가 등장해서 A, B 둘 중 한 명과 대화하고 한 명은 빠지는 식. 이런 패턴이 정말 많이 쓰인다. 구도를 다양한 패턴으로 뒤집는 장면을 보노라면 정말 뜻밖에도 사고를 요청한다. 이 만화에서 유일하게 머리를 굴려야 할 지점. 그러니까, 원래 이런 구도로 시작했는데, 두번째, 세번째, 네번째에서는 왜 이렇게 변했을까 하며 어떤 가상의 동선을 추정하게 된다. 또, 설정쇼트는 없다시피 하며 배경묘사는 없고 말풍선은 무척 크고 케릭터 또한 크게 그려진다. 이게 기본적인 작화 노선이다. 이쯤 되면 정말 뻔하다. 제목. 각 에피소드 마다 제목이 달려 있고 이것을 적극적으로 활용한다. 그런데 이 만화 너무 자극적이다. 뻔하다. 해서 2권쯤 가면 질린다. 어쨌든 이 만화의 결말, 입시와 졸업 이야기를 처리하는 방식은 조금 다르다. 이 일련의 에피소드는 다른 때보다 꽤 길게 진행되며 무엇보다 에피소드가 긴밀하게 연결된다. 심지어 졸업식 당일 날 에피소드에서는 치요의 내레이션이 이 만화에서 가장 진중하면서도 거의 유일하게 어필되는 표층적 메시지를 읊는다. 뭐, 그런 우정, 사랑… 그런 거 졸업과 무관하게 영원히 간다, 가는 것이구나 라는. 만화의 맨 마지막 씬 몇 개. 육인방(오사카, 사카키, 토모, 치요, 미요, 카구라! 여전히 외우고 있다…)이 나란히 걷는 뒷모습과 각 케릭터의 얼굴 클로즈업 같은. 하여튼 이 만화, 흥미롭게 읽었다. 규약이랄까. 설비. 자동화. 장치. 설정. 여러 말을 난잡하게 썼지만 몇 가지 규약(규약이라는 말도 써보자)으로 틀을 만들고 제약을 두고 그 작동으로부터 삐져나오는 결과. 라는 일련의 과정을 아주 쉽사리 관찰할 수 있는 작품이어서. 이 작품은 케릭터를 의도했고 성취했다. 이 만화의 제목 정도는 진작 들어 알고 있었고 김행숙의 황병승 인터뷰는 이 만화를 보게 했다. 역시 그 인터뷰에서도 뻔한 얘기가 나온다. 박찬욱은 한때 이 만화의 영화화를 생각했댄다. 그리고 이제까지 케릭터성이라고 부른 것은 모에라고 수정하는 게 맞는 것 같다. 이 만화는 애니로도 인기가 높았다고 한다. 애니를 봐야 할까 고민이다. 그러고 보니 이 만화가 애니로는 어떻게 나왔을까 궁금하긴 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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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vejeru-blog · 7 yea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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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13
쓰고 싶은 어떤 것, 써야 하는 어떤 것이 내게는 없다. 그런데도 나는 글쓰기를 하고 싶고 좋아한다. 글을 쓸 때 나의 상태랄지 기분이 좋기 때문이다. 다 쓰고 났을 때 쓴 것에 대해 아주 사소하고 하찮은 가치를 아주 잠깐이나마 느끼기도 한다. 그러니까 글로서의 어떤 가치를 발견한다. 또 뭔가 시작해서 끝냈다, 완성했다는 희열을 느끼기도 하고 말이다. 그런데, 다시 말하지만 내게는 도무지 무엇을 써야 한다, 쓰고 싶다는 건덕지가 없다. 이때의 건덕지를 아마 주제라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달리는 주장이라고 할 수도, 관점이라고 할 수도 있겠고. 하여튼 세상은 이러해야 한다, 라거나, 삶이 이래서는 안 된다, 라거나, 이렇게 살아야 한다, 라는 식의 윤리나 비전은 내게 없다. 세상에 새로울 건 없다. 세상에 벌어진 모든 일은 벌어질만했기 때문에, 벌어질 수밖에 없기 때문에 벌어진 것이다. 어떤 일도 놀랍지 않다. 그럼에도 쓰고 싶은 글의 몇 가지 모델은 있는데 그것은 특정 연출 방식, 분위기 혹은 감각, 다양한 구조와 내러티브 형식 등이다. 그런데 이런 서술 상의, 구조 상의 다양한 테크닉을 무엇에, 어떤 이야기에 적용해 써낼 수 있을지 모르겠다. 내게 그런 것은 없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이런 쪽을 생각해봄직 하다. 형식화된 내용. 즉 특정 형식은 특정 내용을 가장 효과적으로 표현하는 방식이라는 입장에 대해서. 특정 내용은 특정 처리 방식을 요청한다는 입장에 대해서. 맞는 말이다. 그러나 그렇기만 한지, 그래야만 하는지에 대해서는 또 의문인 것이다. 쓸 게 없어서 쓸 게 없는 시대. 시대라고 말하는 게 맞나? 쓸 게 있는 시대가 있었을까. 있었다고 물론 말한다. 심지어 쓸 것을 써야만 하는 시대가 더러 있었다고 정리할 정도다. 다시. 결국 새로울 수는 없는 것 같다. 새로울 게 없기 때문이다. 모든 실패한 혁명은 과거에만 있다. 다만. 이런 고민은 있다. 요새 굴리고 있는. 그 고민은, 사유와 감각을, 그것이 그럴 수 없다는 것을 알지만 편의를 위해 분리함으로써 시작한다. 시작한다. 까지 쓰고 나는 밥을 먹으러 다녀왔다. 반찬은 허술했다. 위장을 채워야 해서, 위장을 채우고 싶어서, 손을 놀려 밥과 그저 그런 찬을 밥에 곁들여 이동시켰다. 어느 시점, 어느 곳에서는 이동된 밥과 찬의 형태가 무너졌음은 물론이다. 하여튼 시작한다. 까지 쓰고 나는 다시 자리에 앉아 내가 어디까지 썼는지를 살폈다. 살폈는데 이제는 잘 모르겠고, 사유와 감각이라는 개념, 그것을 분리한다는 생각은 어리석었다.  우선 사유. 내가 사유라는 말을 동원해 범주화했던 것은 무엇이었나. 잘 모르겠다. 그렇다면 감각. 어떤 것이 야기한 어떤 상태나 분위기, 효과를 그렇게 말하려 했다. 이는 시간의 흐름과는 무관하거나 실제적인 장소에 서있지 않다. 감각은 감각과 만나는 순간, 감각에 접속한 순간에만 감지된다. 감각은 건축적이지 않고 감각은 무정형의 덩어리다. 사유는. 글쎄, 사유는 엑스레이랄까, 투시도, 혹은 공학인 것 아닌가. 사유는 지속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리고 사유에 접속한다는 개념은 없다. 감각은 감각을 만들고 감각으로 이끄는 메커니즘을 전제한다. 그러므로 감각은 디자인된 결과다. 그렇다면 감각은 사유를 따른다. 그렇다면 질문을, 질문을 어떻게 수정해야 할까. 완성된 감각 만을 보이는 것과 혹은 어떤 입장, 태도, 윤리와 그에 관한 회로도를 보이는 것. 하지만 아무리, 아무리 생각해도 테마는 필요하다. 작가적 글쓰기와 테마는 동시에 형성되는 것이라고 ��야 하겠다. 테마가 먼저 있을 수 있을까. 테마가 이미 거기에 주어진 것이 아니라면 방법은 오직 그 생성적이고 동시적인 훈련에만 있는 것 아닌가. 결과를 만들어 내는 작용 없이, 그 틀 없이 무언가 생성되고 찍힐 수 있겠는가 싶다. 사정이 이러하다면 나의 결론은 너무나 뻔한 그것이다. 규칙을 몇 가지 만들기. 만든 규칙을 끝까지 유지, 적용하기. 시작부터 끝까지, 그 사이에서의 운동. 그 운동의 성질을 관찰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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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vejeru-blog · 7 yea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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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vejeru-blog · 7 yea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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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11
집밖에 나갈 일이 없다. 건강이 안 좋아졌다고 생각해도 될 것 같다. 몸이 원체 허약하다고 생각해도 좋다. 원체 허약해서 건강이 안 좋아졌다. 이제는 인정할 수밖에 없다. 건강은 중요하다. 튼튼한 몸은 좋다. 일부러 나간다. 나가서 몇 십 분 걷는다. 이렇게라도 시작하려고. 18년 간 한 곳에 살았다. 아파트. 단지 곳곳의 화단의 나무들이 1층을 가리는 용도로 기능하고 있다는 걸 깨달았을 때는 놀랐다. 얼마 전, 이곳에 산 지 18년 만에 이것이 눈에 들어왔다. 프라이버시를 지키기 위한 설비. 시시때때로 경비원이 화단을 가꾼다. 경비원은 늙은 남자다. 열두 시가 지난 때에 단지를 거닐 면 그들이 둘씩 모여 벤치에 앉아서 혹은 나란히 걸으면서 대화 나누는 모습을 볼 수 있다. 가끔 담배를 피우기도 한다. 더러 배가 나왔고 키가 작은 그들은 후줄근한 유니폼을 입었다. 초소 옆의 분리수거 장. 박스를 밟아 납작하게 만들었다. 경비원은 그것에 그렇게 고마워하는 것이었다. 다시 나무. 한국의 도심에는 나무들이 정말 많다. 가로수. 하여튼 꽤 깔끔하게, 많이 심겼다. 그런데 의식하고 보지 않으면 볼 수 없는 게 가로수다. 그걸 발견했을 때 그런 게 있다는 것, 많다는 것에 조금 놀랐다. 오늘도 나갔다. 좀 걷게. 낮에. 산책로 한 블록에 나무 열네 그루가 나란히 설치되어 있었다. 인도와 차도 사이의 가로수는 아파트 화단의 가로수와 설치 의도가 비슷할지도 모른다. 폭주해 인도로 육박하는 차를 사전에 차단하기 위한. 그러나 어찌되었든 가로수는 이제 너무 지긋지긋하다. 아주 가소롭다. 반면 한국에는 숲이 없다. 숲과 산. 숲과 산은 확실히 다른 공간인데 산은 한국에 많아도 숲. 숲은 없다. 숲이 있다면 그것은 관광지로 유명한 숲일 터. 그런데 산이 많다 하더라도 관광지 아닌 산은 또 없다. 그러니까 야산이라고 부르고 싶은 산은 또 없다. 강원도에서 군생활 했을 때 야산을 많이 봤는데 이런 산에 민간인은 들어가지 못한다. 군대용어 중 야전이 있다. field. 초등학교 때 한국은 사계절이 뚜렷한 나라, 그래서 좋은 나라라고 배웠다. 계절, 날씨. 통제할 수 없는 환경이 몇 개월마다 심하게 바뀐다는 것은 가혹한 일이다. 좋지 않다. 가끔 그런 게 궁금하다. 새콤달콤 껍질 같은 작은 것들. 이런 건 금방 바람에 날려 시야에서 사라지는데 그것을 추적하고 추적하면 어디에 이를지. 껍질은 어떻게 될지. 끝이 난다면 어떤 끝일지. 지우개 가루나 빨대나 뭐 그런 하찮은 사물 말이다. 담배갑을 싼 비닐포장. 을 벗겨낼 때 손잡이로 기능하는 얇은 비닐. 이런 건 대개 길거리에 내버리는데 이런 건 어떻게 되는 것일까 하는 것이다.
신문기사에서는 인명 뒤에 괄호를 친다. 그 괄호 안에는 나이가 기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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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vejeru-blog · 7 yea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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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11
열네 살 때부터였으니 어언 10년을 훌쩍 넘도록 나는 음반을 수집했다. 샀다, 나 구매했다, 가 아닌 수집했다, 고 한 것. 이 행위의 한 성격을 어필하는 동사. 수집하고 있다, 나 수집할 것이다, 가 아닌 수집했다, 고 한 것. 이 행위의 현상태를 어필하는 시제. 최초는 테이프였고, 9할 9푼 이상은 CD이며, 한때는 LP에도 손을 댔다. 소리그림, 향뮤직, 신나라, 핫트랙스, 알라딘 중고샵과 알라딘 중고서점. 서울과 부천에 자리한 여러 헌책방. 아 귀찮다. 그러니까 그렇게만 알자. 하여튼 내가 상당한 기간 동안 음반을 모았다는 것. 이걸 구구절절 묘사할 능력도 의지도 내게는 없다. 당신에게 필요한 것은 이 앞, 앞 문장이다. 내가 상당한 기간 동안 음반을 모았다는 것. 중요하니 한 번 더 반복하자. 나는 상당한 기간 동안 음반을 모았다. 이 문장이 무언가 설명할 수 있다 해도 딱히 좋을 것 같지는 않다.
그러다가 수집에 회의를 안긴 계기가 있었다. 어떤 음반, 1년 이상 찾아 헤맨 음반을 산 일. 에이펙스 트윈의 <85년부터 92년까지의 앰비언트 선집>. 이걸 손에 넣기 1년 전 나는 리처드 D. 제임스의 앨범 <리처드 D. 제임스 앨범>에 감명을 받아(이 앨범은 알라딘에서 샀다. 알라딘 중고샵이나 알라딘 중고서점이 아닌, 알라딘 음반 카테고리에서 신품을 샀다.) 이 앨범과 관련된 앨범인 <85년부터 92년까지의 앰비언트 선집>의 곡을 유튜브에서 몇 개 찾아 들어 보았는데 무척 재미있어 음반을 구매해 들어야겠다고 결심했다. 그러니까 그때까지는 이런 생각이 나를 지배했다. 음악을 들으려면, 듣고 싶으면 음반을 구매해 듣는다. 우리는 이런 속성을 너무나 잘 알고 그에 관한 메커니즘의 작동원리 역시 잘 알지 않은가. 그러니까 비근한 예를 드는 것으로 나는 나의 무지를 피하련다. 영화를 보려면, 보고 싶으면 영화관에 가야 한다. 영화관에서 영화를 보는 행위는 영화의 영화성을 살리는(영화는 죽어가나?) 일이다. 인공호흡으로써의 영화관 관람. 당신은 무슨 말인지 안다. 나는 음반을 구매해 듣는 것에서 음악 감상의 진정성을 찾았다. 그러한 까닭으로 나는 스트리밍을 안 썼다. 씨디에서 추출한 MP3 파일을 핸드폰에 넣어 들었다. MP3 파일을 핸드폰에 넣어 들었다.
<앰비언트 선집>은 네이버 중고나라에서 발견했다. 단돈 만원. 하여튼 적잖이 허탈했지. 1년을 넘도록 찾아 헤맸는데. 그렇게 며칠 기다려 도착한 씨디는 흠집이 많이 나있었다. 속지도 부실했고. 어쨌든 음원을 추출해 앨범을 듣는데 기분이 참 묘했다.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의 내게 <앰비언트 선집>의 음악은 꽤 신비로운 음악. 그때도 그랬지만 지금도 그 음악의 메커니즘과 메커니즘이 야기한 효과 – 즉 느낌을 설명할 수 없다. 설명하고 싶지 않기도 하고. 그냥 퉁친다. 퉁칠 수밖에 없는데 하여튼 묘했다, 신비롭다, 그래서 결국 좋았다. 얼추 좋았다는 말이다.
그렇게, 낯선, 낯설고 비인간적인 음악 – 비인간적인 음악이라는 표현이 마음에 든다 – 을 듣기 위해 공들였던 과정과 그 과정을 지배하는 테마가 무척 우습고 가소롭게 느껴졌다. 아닌 게 아니라 그것은 좀 웃긴 일이 아닐 수 없다. 1년을 찾아 헤매다. 중고나라에서 발견하다. 돈을 입금하고, 판매자는 포장을 하고, 택배를 부치고, 나는 그것을 받고. 낡은 씨디 케이스. 이런 일련의 과정은 우스꽝스럽다. 그리고 가장 우스꽝스러운 사실 하나. 씨디라는 매체의 물질성. 가만 생각하면 이것은 심히 시대착오적이다. 광학적 원리의, 플라스틱 재질의, 도너츠 모양의 저장장치. 매체가 담은 내용은 어땠나. 어쩌면 이것이 그 물질성을 더 두드러지게 한 요소일 텐데, 나는 모르긴 몰라도, 에이펙스 트윈이 이쪽 업계에서 한 가닥 했던 인물이었다는 정도로는 말할 수 있다. 어쨌든 구린 작자는 아니었다, 아니다, 라는 것. 나는 지금도 그가 좋다. 어쨌든 결과적으로 씨디에 담긴 에이펙스 트윈은 나의 음반 수집열을 차게 식혔다.
제약에서 풀린 셈. 이 이후로 나는 웹에서 이용 가능한 다양한 루트를 통해 이전보다 넓은 스펙트럼으로 음악을 들었다. 듣고 있다. 그래서, 좋다. 넓게 여러 음악을 듣고 있다. 아주 좋다.
다만 몇 가지 고민하고 생각할 거리는 더러 있는데, 하나, 무절제하게 음악을 갖게 되어 들어야 할 음악이 쌓이고 밀렸다는 것. 음악을 이해하고 수용하는 데 일정한 시간이 필요하니까. 둘, 아직 이전 방식의 관성, 그 신화에서 완전히 자유롭지 못하다는 것. 애착이 안 생긴다, 덜하다 할까. 음반을 사는 데 드는 물리적 수고로움이 없어졌다, 음반의 물질성이 없어졌다는 데서. 셋, 새 방식의 감상을 통해 알게 된 음반 몇 개는 추후 음반으로 소장해두고 싶다, 그 신화를 아주 내버리지는 않겠다는 것.
  나에게 음악 감상은 어느 순간부터는 작법이랄지 태도, 접근법, 영향 관계를 살피는 학습이 된 느낌. 계보를 훑는 작업. 메이저와 마이너의 정전을 독파하는 과정. 아카이빙. 데이터베이스 구축. 그런 점에서라면 더욱 좋은 접근법이니. 서점에서 탈출한 것 같다.
  얼마 전부터 생각했고 몇 시간 전에는 대강 결정 비슷한 것을 하기도 한 것 같은데 50권에서 몇 권 모자란(군 부대에 몇 권 놓고 나왔다) 창비 한국문학 전집은 내다 팔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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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vejeru-blog · 7 yea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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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10
옷에 대해 생각하니 박일환 상병 –물론 나는 박일환 일병과 박일환 병장을 경험하기도 했고 전역 후에 일환이 형을 본 일도 있지만 역시 박일환은 상병이었을 때의 모습이 강하게 남아 있는데 이는 상병이었을 때의 박일환을 가장 오래 접했기 때문만은 아닌 것 같다- 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그는 자신을 소개할 때와 군대 바깥 생활을 그릴 때 ‘옷 입고 싶다’, ‘옷 입는 거 좋아한다’는 말을 자주 했다. 이 언명은 축어적으로는 해석할 수 없다. 생략된 부분이 많기 때문이다. 좀 더 구체적으로 박일환의 말을 풀어 볼까. 나는 내 마음에 드는 옷을 골라서 입는 것을 좋아해. 이 정도로 시작할 수 있겠다. 이때 ‘마음에 드는’에 유의해야 한다. ‘내’ 마음에 드는, 이라고 했지만 내 마음에 든다는 게 내 마음에만 든다는 뜻은 아니다. 그리고 마음에 드는, 이라고 했을 때 마음에 든다는 의미는 무엇인가. 뒤의 질문에 대해 우리는 그것은 잘 입었다, 멋지다와 동의어라고 대답할 수 있다. 또 내 마음에 든다는 것은 다른 사람에게도 마음에 든다라는 것이다. 아니다. 우리는 더 정확히, 더 솔직히 말할 수 있는데, 우리는 다른 사람이 마음에 들어 하는 옷차림을 마음에 들어 한다. 다른 사람이 마음에 들어 하기 때문에 우리는 마음이 놓인다. 요컨대 다른 사람에게 멋지다, 잘 입었다고 여겨지는 옷차림을 한 상태를 나는 좋아한다, 고 박일환은 말했던 것이고 나는 옷을 잘 입는다, 멋지게 입는다는 가치평가가 이루어지는 맥락을 말하려는 것이다. 우리는 특정 시기, 특정 장소, 특정 세대를 관통하며 유행하는 스타일이 있다는 것을 안다. 유행한다라는 것은 그 유행의 대상이 가치있는 것으로 여겨진다는 것을 뜻한다. 또 특정 시기, 특정 장소, 특정 세대, 특정 직군은 특정 복식을 반드시 입어야 한다. 다시 요컨대, 우리는 옷을 입는 데 일정한 욕망과 규범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렇다면 옷을 입는다는 행위는 의사소통 체계이자 가치 체계로 기능한다는 것이다. 별도의 체계가 작동하고 있다는 것. 우리는 그 체계에 접속해 그 날의 테마, 나의 신체조건에 부합한다고 해당 체계가 추천하는 리스트에서 요소를 선택한다. 복식체계는 언제나 이미 형성되어 있는 것이고, 굉장히 구체적이고 편리하다.
상의가 화이트 셔츠일 때 우리는 트레이닝 팬츠를 입지 않는다. 정장을 입었을 때 슬리퍼를 신지 않고, 속옷을 외투 위에 입지 않으며,
  김인권 형과 처음 대면하여 대화를 나누었을 때 내가 스타일이 좋다고 그에게 말하자 안 꾸미는 사람은 싫다는 취지로 그가 답했던 기억이 난다. 옷은 자기표현의 한 방식이다. 그것에 무심하거나 둔감한 누군가가 있다라는 것.
 복식 체계라는 말이 추상적이고 이론적이라면 복식 데이터베이스는 복식 생활에 훨씬 밀착한 영역일 것이다. 이 데이터베이스에 잘 입은, 잘 꾸민, 멋진 복식 요소가 저장되어 있다.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
 복식 생활과 복식 데이터베이스의 형성에 있어 선후 관계를 따질 수 없다.
 어느 순간. 아마 최초의 순간이겠지. 입을 수밖에 없는 최초의 순간이 있었을 터. 더 정확히 말할 수 있겠지. 그것은 옷을 입는다는 개념은 아니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큰 나뭇잎이 되었든 동물의 가죽이 되었든 그것을 몸에 둘러 몸을 보호하는 것이 유일한 목적이었기에. 생식기를 보호해야 한다. 추위를 방어해야 한다. 복식의 기능성.
 어느 순간. 복식에는 권능이 부여된다. 제사를 지내는 부족장. 복식의 상징성.
 어느 순간. 특정 계급만 입을 수 있는 옷. 특정 성별만 입는 옷. 특정 지역에서만, 국가에서만, 민족에서만.
 이런 식으로 성격은 추가되고 그 성격들이 축적되어 형성된 데이터베이스는 규칙의 저장고와 같다. 규칙을 어긴 사건 역시 규칙으로 추출되어 포섭된다. 군복이 코스튬 플레이의 도구와 밀리터리룩으로 분화 발전한 양상.
 그런데 옷이 아름다움을 표현하고, 옷으로 아름다움을 판가름할 수 있게 된 경우는 언제 어느 복식에 대해서부터였을까. 어느 환경이 그것을 가능케 했을까.
 내가 궁금한 것은 ‘옷을 못 입는다’라는 개념이 복식 데이터베이스 안에 이미 포함된 구성 요소 중 하나인지, 아니면 그것이 플레이어가 데이터베이스를 외면하거나 오독한 결과인지.
 후자인 걸까. 그런 것 같다. 옷을 못 입는 플레이어는 데이터베이스를 제대로 이용하지 못한 결과인 것은 아닐까. 이 경우 주도권은 플레이어 – 인간에게 있고 데이터베이스는 단지 제공처로서 기능하는 것이겠다.
 가령 어떤 운동화, 어떤 청바지, 어떤 티셔츠가 그것 자체로 틀린 옷이 되는 것은 아니다. 이 상황에는 두 가지 조합 양상이 있는데, 하나는 운동화와 청바지가 복식의 구성요소로서 조합되는 양상과 하나는 그 조합을 입는, 즉 그 조합과 조합되는 인간이라는 양상이다.
 (청바지 + 티셔츠 + 운동화) + 플레이어
 그렇다. 그렇다면 데이터베이스를 탓할 수는 없는 것이다. 잘못은 그 데이터베이스를 이용한 플레…….
‘잘못’이라고 했는데 잘못은 아니겠지. 하지만 그런 합의는 분명히 있다. 엄격한 평가. 그러니까, 단순화해서 말하자면 잘입네/못입네 하는. 다시. 내가 궁금한 것은 이 ‘평가’의 기준이 어디서, 누구에 의해, 어떻게 형성되는가 하는 점이다.
 어쨌든 터득한 결과 하나. 데이터베이스가 가치평가의 제기준을 포함하는 상위 개념은 아니라는 것. 데이터베이스를 이용한 결과에 어디선가 나타난 가치평가의 제기준이 찍혀진다 라는 것. 그래서 이후의 과제는 평가 기준이 어디서 나타났는지를 규명하는 것. 그러니까 잘입은 옷, 멋지게 입은 옷, 예쁜 옷차림을 왜 그렇게 인지하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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