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umgik
hoshico · 7 yea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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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으로서 언어를 배운다는 것에 대하여
요즘 일본어를 배우고 있다. 처음에는 필요에 의해 이것저것 공부하기 시작했는데, 워낙 천성이 재미없는건 공부 못 하는 팔자인지라 이것저것 애니메이션이며 일드며 고양이 인스타(...)까지 찾아보며 배우다보니 생각보다 빨리 늘고 있다. 간만에는 본가에 간 김에 어렸을 때 공부하던 일본어 책도 잔뜩 가져왔는데, 감회가 새롭다. 그 때만 해도 지금보다 훨씬 공부를 안 했을 때라 아는 게 거의 없었을 터인데 온통 책은 중급자용. 지금 봐도 어렵다. 하여간 이 놈의 자존심이란. 이러니 당연히 어렵고 재미없어서 공부를 안 했지 싶은 생각이 든다. ㅋㅋㅋ
그런데 요즘은 기계도 언어를 배우고 있다. 사실, 그 도움을 굉장히 많이 받고 있다. 원래 번역을 할 때도 마찬가지였지만, 특히나 한자가 넘치는 일본어는 사전을 찾는 것만으로는 한계가 있는데 구글 번역으로 대충 문맥을 한번 훑은 뒤에 필요한 단어를 공부하는 것만큼 도움이 되는 게 없다. 세상 참 좋아졌어. 라는 생각을 하다 문득 그런 생각이 따라오는 걸 막을 수 없다. 세상이 점차 좋아지면, 더이상 언어를 배울 필요도 없게 되는 거 아냐? 
한때 O2O 열풍과 함께 IT 업계에서는 중국어 배우기가 한창 붐이었던 때가 있었다. 그때 난 이미 20대 초반도 한참 넘은 직장인이었고, 어렸을때 조금이나마 비벼본 일본어와는 달리 중국어는 흥미도 없고 잘 할 수 있을 것 같은 생각도 들지 않아 아예 배우려는 시도조차도 하지 않았던 기억이 있다. 그럼에도 이미 크롬의 페이지번역 같은 것들은 나와 있었으므로, 가끔 중국어 웹페이지를 읽는 데는 큰 문제가 없었던 것이 사실이다. 뭐 중국에 가서 업무를 한다면야 모르겠으나, 그렇지 않고서야 내가 암만 열심히 배워도 기계가 나보다 중국어를 잘 할 것이란 불변의 사실이었다. 그게 뭐 중국어 뿐만이겠는가. 언어가 인간의 고유한 특성이라 얘기되었던 게 엊그제 같은데, 기계는 최소한 나의 언어능력은 한참 뛰어넘고 있는 것 같아 보인다. 
그러니 사실상 일본어를 배우는 일은 그다지 필요없을지도 모른다. 플레이되는 음성에 따라 자동으로 자막을 붙여주는 기술은 몇 년 새 크게 발전하고 있다. (그러나 아직도 갈 길은 멀다.) 며칠 전 구글은 현실세계의 바벨피쉬라 할 만한, 외국어를 실시간으로 번역해주는 이어폰을 출시했다. 이렇게 좋은 시대를 사는 인간으로서는, 뭔가를 배우다 보면 인간이라는 존재의 결함을 사무치게 깨닫는다. 배우고, 배우고, 또 배워도 머릿속에 남는 것이란 참 하잘것없기 때문이다. 몇 번이고 반복한 내용이라도 조금만 소홀하면 어느샌가 사라져 버린다. 계속 배워나갈수록, 모르는 것이 너무나 많다는 사실만을 깨닫게 될 뿐이다. 
동시에 왠지 바로 그렇기 때문에 재미있지 않은가 하는 생각도 든다. 원래 반복되는 일이란 재미없는 것이니까. 사진이 처음 등장하여 대중화되던 시점인 19세기에서 20세기 사이에 미술계에서 전에 볼 수 없이 다양한 화풍이 쏟아져나왔다는 것만큼이나 재미있다. 인상주의, 추상표현주의, 야수파, 큐비즘.. 이전까지의 미술에서, 기록으로서의 역할은 최소한 얼마 이상을 차지하는 중요한 일부분이었을 것이다. 그러다 무엇보다 그 역할을 잘 해낼 수 있는 사진이 등장하며 그 역할의 의미가 없어지는 순간 (어쩌면 자신의 새로운 정체성을 찾기 위한?) 얼마나 수많은, 비지속적이고 또 그래서 자유롭고 아름다운 시도가 많이 나타났는가 하는 것은 꽤나 많은 것을 이야기해 주는 것 같다. 개인적으로는 인상주의 화가들이야말로 가장 재미있는 사람들이라고 생각한다. 자신의 눈에만 보이는 그 오묘한 색깔을, 그것도 오직 그 순간에만 유효한 모습을 담으려 한 모네나 (대단히 많은 비난을 받았다고 들었다.) 발레처럼 역동적인 무대에서, 마치 눈을 깜빡이는 단 한 순간 비친 것 같은 풍경을 사랑한 드가. 마치, 당장에 사라져버리지 않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다고 주장하는 것 같지 않은가. 매일처럼 똑같이 돌아가는 톱니바퀴에서 빠져나와 바라본, 결코 일 분 일초도 똑같지 않은 바깥 세상에 환희를 느끼는 풀려난 죄수처럼.
그러니 아마 바로 이 시기에 언어를 배운다는 것은, 묘하게도 굉장히 스스로를 자유롭게 하는 일이고 바로 그렇기 때문에 내키는 것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나는 결코 일본어에 있어 기계를 넘어설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기에, <꼭 하지 않아도 좋은 일>이기 때문에 꼭 해야 하는 일 따위는 훌륭한 기계의 도움을 받으며, 내가 하고 싶은 일에 대해서만큼은 그 어느 때보다도 재미있게 임할 수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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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shico · 7 yea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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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부터 글쓰기는 내 취미가 아니었다
공간이라든가 관리라든가 의미라든가 어쩌면 너무 많은 의미를 부여하려 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착하고 성실하게 사는 것이 취향이 아니라면 한량같은 것은 아마도 괜찮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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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휴 첫날, 엄마랑 아빠가 동시에 병원에 입원했다. 
물론 예상치 못한 사고 같은 건 당연히 아니었고, 그보다는 60년 가까이 삶을 짊어지고 온 결과였다. 해가 갈수록 정신은 익어가는데, 딱 그만큼 몸은 낡아간다. 시간이 지나며 많은 것을 용서할 수 있게 되고, 그만큼의 무게대로 점차 바닥으로, 조금씩 꺼지는지도 모른다. 
결론은 두 분 모두 만성적인 척추 질환. (및 어깨 인대 노후화.)
여러가지 생각이 들었는데, 일단은 좀 슬프다는 것이었다. 뭐 부모님이 언제 이렇게 나이를 먹으셔서... 그런 거라기보단, 언제까지나 인생이라는 게 뭔가를 (물질적인 거든 지식이든) 얻어가는 것이라 생각했는데 지금 정도에 와서 보니 묘하게 뭔가를 뺏기는 시점에 도달했다는 느낌이랄까. 만년 즐겁고 행복한 때만 있을 것 같던 시기를 지나, 패를 주고받을 수밖에 없는 입장에 놓이게 되었다는 느낌이 든다. 부모님의 건강이라는 것도 결국 시간이 지날수록 인생에게 뺏기는 것이다. 그것도 시간이 갈수록 필패하는 게임..... 뭔가 싫어서 입맛이 썼다.
괜히 눈물이 날 것 같은 느낌이라던가 하는 식으로 감성적이 되지는 않았고, 다만 인간이라는 종? 인생?? 에 대해 묘한 회의감이 들기는 했다. 정확히는 인간의 신체가 너무 부서지기 쉽다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 몇 년 전에 유럽을 갔을 때에는 하루에 12시간을 걸어다녀도 발바닥만 아플 뿐 몸은 멀쩡했다. 오늘 아빠 이야기를 들으니 하루 30분만 걸어도 찢어지는 듯한 허리 통증이 있단다. 물론 과학적인 이유가 있다. 4-5번 척추 디스크가 협착이 되어 다리로 가는 신경을 묵지근하게 짓누른다는 것이다. 심해지면 점차 통증을 유발하게 되는 시간은 짧아지는 것이고. 12시간이 30분으로 줄어드는 데는 딱 30년 정도밖에 필요치 않았다. 인생이 유한하다는 거야 알았지만 이렇게 셈으로 딱 떨어질 만큼인지는 몰라서- 좀 사기를 당하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래서 뭐 어쩌냐- 라고 하면 사실 잘 모르겠고, 생명이 오락가락하는 것도 아니니 인생을 돌아볼 필요까지야 있나 싶은 것도 사실이다. 뭐 거창하게 희망을 가지고 살아야 한달 것도 아니고, 그냥, 인간으로 태어나서 겪게 되는 운명의 사이클의 일부분. (”몇십 년 동안 잘~ 직립보행 했지?” 라는 느낌.) 한편으로는 ‘그러니 인간은 장차 유한한 육체로부터 무한히 튼튼한 그릇으로 옮겨져야 한다'는 생각도 들고, 망량의 상자나 뭐 이런저런 이야기에 등장하는 매드 사이언티스트들이 사랑하는 사람을 잃었을 때 왜 그리 불사의 육체에 집착했나 하는 것도 조금은 이해가 된다. 결국에 가서는 뭔가를 잃어버리게 되는 것이다. 갑작스럽게 찾아오는 불행 같은 것이 아니라, 천천히, 조금씩, 아주 느리게, 꽉 움켜잡았던 주먹의 손가락 사이사이를 하염없이 흘러내리는 모래알처럼 인생에서 당연하게 여겼던 것들을 조금씩 잃어간다.
그러다...끝.
그러니 아마 일상적이지 않은 감각으로 또다시 끝에 대해 생각하게 되어 좀 심란하고 우울한 듯하다. 어쩜 생물로서의 당연한 현상이 아닐까? 하지만 생존 본능은 강하니 좀만 지나면 다시 잘 살기 위해 최선을 다하겠지. 
잘 모르겠다면 좀더 살면서 생각해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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