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umgik
camilletoday-blog · 7 yea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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졸업 다음의 시작
대학원 생활을 빌미로 시작한 뉴욕 이주와 유학 생활.(중간에 기혼학생 생활이 되고 말았다만) 2년짜리 학사 일정은 생각보다 너무 짧았다. 뭘 해야할지 감이 올만하니 끝나는 느낌이고.
지난 화요일에 졸업식을 하고, 드디어 길고 길었던 학생 신분에 종지부를 찍었다.
초등학교(국민학교 부터) 6년, 중고등학교 6년, 그리고 대학 8년과 대학원 2년의 학생생활 22년.
앞으로 또다른 분야나 상위학위 공부를 또 할지 아직은 모를 일이지만 일단은 하고 싶었던 공부를 무사히 잘 마쳐 기쁘다.
그러면서도 학생이 아니었던 인생이 처음이라 무진 겁도 먹고 있다.
미술 전공과 유학은 늘 원했으면서도 동시에 겁나는 각자 별개의 선택지였는데, 두 개를 한 번에 시도했던 뉴욕에서의 지난 시간은 다행히 게으른 내가 딱 즐길 수 있을만큼의 역경이었고, 더이상 아쉬울 게 없을 정도로 열심히 보냈다고 자부한다.
학교에 있으면서 학생신분을 울타리 삼아 냉혹한 현실 세계에 대한 부담 없이 작업에 대해 많은 생각과 시도들을 할 수 있었고, 미국(이라기보단 뉴욕)에서 어떻게 이 바닥과 관계를 맺어야하는지 학교를 통해 재밌는 방향으로 배울 수 있었다. '뉴욕은 다른 사람들의 성공보다는, 실패의 경험을 더 많이 볼 수 있는 도시구나'고 뉴욕 생활 초반에 느꼈던 게, 사실이란 걸 배운 시간이었고. 덕분에 여기서 버틸 수 있는 마음가짐을 많이 다지기도 했다.
미국생활 적응 초반에 운좋게 일자리를 구한 것처럼 보였으나,(일자리라고 해봤자 애니메이션 스타트업이라 돈도 안 받고, co-founder 느낌으로 투자 받으면 얼마나 나눌 것인지 지분 얘기한 게 다였지만 그 지분이 컸고, 나는 순진했고, 그것은 물거품이었다!) 트럼프를 지지하고 그것을 계속 강요하는 동업자와의 트러블로 첫 기획은 불발.
학교 다니며 전시 기회나 레지던시 기회를 계속 잡으면 뭐라도 되어 졸업하겠지 하고 생각했는데, 그게 썩 가시적인 청사진도 아니었던지라, 결국 아무것도 아닌 상태로 졸업이 되어버렸다.
졸업식에 온 엄마가 졸업장을 흔들며 그랬다. '그래, 이게 1억짜리 종이구나'
맞는 말이지. 애초에 투자 전망(?)이 좋지 않은 일이었지만, 그래도 그렇지 마치고 보니 정말 딱 이 아무짝에도 쓸모 없어보이는 종이 한 장 쥐고 나온 느낌이라. 더구나 이제 도피할 학생 찬스마저 다 써버렸다(지금 전공한 분야에선 석사가 가장 상위이다).
가장 큰 두려움은, 나 자신이 얼마나 게으른지 내가 아주 잘 안다는 것에서 온다.
원래도 학사 일정이 바쁜 건 아니었지만, 허술하나마 학교 일정들은 침대 밖으로 나와 시내에 가고 사람들을 만날 구실이 되어줬는데. 이런 느슨한 일상마저 없어지면 이제 나는 오후 두시쯤 느지막하게 일어나 이런 인간이 숨쉬어도 될까 하는 죄책감으로 한 5시까지 인터넷이나 하며 뒹굴거리고, 그런식으로 남은 하루를 떼우다가 에이 오늘은 버렸으니 내일부터 일찍 일어나보자 하고 다시 밤새기를 반복한다는 걸 나는 너무 잘 안다.
졸업식을 하고, 졸업 전시를 오픈하고, 생일을 보내고, 졸업식을 위해 방문했던 엄마를 보내고... 바쁜 한 주를 핑계삼아 살짝 그 걱정을 미뤄뒀는데, 이제는 정말 이 불안과 직면해야할 때가 아닌가 싶어서 블로그를 시작한다. 새 주에는 완전히 새로운 일상이나 규칙적인 습관들을 만들기 위해 여기저기 기웃거리고 있다. 블로그도 그 중 하나다.
(벌어봤자 용돈 정도겠지만)비자 관계나 교우 관계 때문에 원래는 무보수로 하던 어시스턴트 일을 유급으로 돌리는 걸 상의 중이고, 그간 지원했던 레지던시 프로그램들의 콜을 기다리고 있으며(워낙 경쟁률이 센 프로그램들이라 진지하게 생각하고 있진 않지만), 가르치는 직업군에 슬슬 지원을 준비하고 있다. 물론 작업 일정들도 차곡차곡 생각을 하고 있고, 밖에 나가는 일들을 더 주기적으로 만들기 위해 다음학기 (전)지도교수님의 수업 청강도 신청해뒀다. 코딩도 배우고, 네온사인도 배울 생각인데 아직은 기본적인 일상을 먼저 다져놓는 게 우선이라. 계획만 많다.
무슨 내용으로 블로그를 해야하지 며칠을 고민했는데, 일단 블로그를 시작하는데 몇 장애물이 있는 걸 정확히 알아야겠단 생각을 먼저 했다. 게으르고 끈기 없는 건 너무 잘 아니까 언급할 필요가 없고.
첫째, 장문의 한국어를 쓰지 않게된 환경 탓에 글쓰기가 예전만큼 즐겁지도, 자신있지도 않다는 것.
대학 붙자마자 미국 오기 전까지 8년간 논술과외로 유흥비를 벌어 쓰면서, 좋든 싫든(대부분 싫음이었지만) 돈벌이를 위해 2,000자 이상 글쓰기를 기본으로 작문은 늘 수월히 했었는데, 트위터를 제외하고는 하루 종일 영어만 쓰고 영어만 듣고 영어만 읽는 생활을 2년 가까이 했더니, 이젠 한국어 맞춤법도 늘 헷갈리고, 긴 문장들의 촘촘한 짜임을 잃은지 오래다. 가끔 긴 글을 써놓고도 그 문장들이 찰지게 붙었다 떨어졌나를 확신할 자신이 없다. 이젠 맞춤법은 고사하고 띄어쓰기도 장담 못하게 되었다.
둘째, 트위터라는 매체에 너무 익숙해진 나머지, 과연 내가 SNS가 가진 사전적 의미를 실행하고 있느냐 하는 의문이 들었다. 인스타그램, 페이스북도 잘 사용하질 않는데 오직 트위터만 오랜 시간을 할애한다. 트위터는 굉장히 폐쇄적인 매체고, 내 타임라인은 100명이 좀 넘는 내 팔로잉의 리액션이 전부다. 다시 말해, 나는 다른 매체의 소통 방식에 익숙하지 않다는 말. 내가 익숙한 트위터로 뭔가를 기록하기에, 세상이 트위터를 하지 않는다. 과연 블로그란 매체를 능숙하게 활용할 정도로 내가 익힐 수 있을까?
셋째, 소재의 문제. 는 이제 해결했으니 제외할 수 있겠지만. 고민을 시작한 때엔 '뉴욕에 사는 한국어 서술자가 꾸준히 쓸 수 있는 소재'에 대해 생각이 많았다. 뉴욕은 많은 사람들에게 익숙한 도시라서, 여행 블로그도 많고, 일상 블로그도 많고, 패션 블로그도 많고, 무튼 많다. 근데 이들과 같은 계열로 글을 쓰기에 나는 재치도 없고 센스도 없고 돈도 없고, 여러모로 빈 구석이 많다. 무엇을 쓸 수 있을까. 내가 가진 시간과, 한국어와, 이제 막 졸업장을 받아든 전공과 연계된 것으로.
앞으로의 삶을 점쳐보자면 아무래도 한국어보다는 영어를 사용하는 환경에서 생활할 가능성이 큰데, 꾸역꾸역 블로그를 하다보면 그래도 내가 가진 한국어 스킬들이나 습관들을 유지라도 할 수 있지 않을까. 나는 글을 재미있게 쓸 줄 모르는 대신 믿음직하게 구사한다.고 스스로 믿는다. 밑도 끝도 없는 믿음이다만. 아무도 보지 않더라도 줄줄 쓰다보면 예전의 감을 조금은 되찾지 않을까. 일단은 나쁜 습관인, 반복되는 형용사나 미사여구와 영어 단어 혼용을 없애고, 대신 고급단어 활용을 늘이는 것을 익혀야지. 한국어 단어들이 머릿속에서 뭉뚱그려 맴만 돌고 입으로 나오지 않는 나쁜 건망증이 큰일이다.
블로그의 매체성도 그렇다. 배우다보면 익숙해지겠지. 즉각적인 반응과 성향이 돋보이는 다른 SNS 매체들의 홍수에서도 블로그가 그 생명력을 유지하는 건 블로그만의 성격이 분명하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그간 시도했다 귀찮음에 말아먹은 여러 블로그들의 주소와 제목들이 스치우는데, 아무래도 매체 자체에 대한 이해가 떨어져서 그랬던 건 아닐까 스스로에게 변명하며, 이번 블로그의 생명이 얼마가 될지는 나의 절박함에 달렸다고 새로이 다짐해본다. 무엇에 대한 절박함인지는 모르지만, 블로그로 돈을 많이 버는 사람들도 있고, 책을 만드는 사람들도 있으니, 이것도 뭔가 활용 가능한 재료가 되었으면 좋겠다. 궁극적으로는.
소재는, 나를 위해서도, 첼시나 로워 이스트 사이드에 있는 중소규모 갤러리들의 전시를 한국어 웹에 중계하는 것이 좋겠다고 잡았다. 학교가 첼시에 있으면서도 직접 가서 본 전시가 손에 꼽힌다는 건 좀 부끄러운 일인 것 같은데, 이젠 그나마도 그 동네에 갈 일이 없어졌으니 억지로라도 뭔가 만들지 않으면 영원히 가질 않을 것 같다고. 로워 이스트 사이드를 중심으로 하는 게 더 낫지 않을까 생각하고 있다. 그리고 학생 단위의 전시 같은 것들도. 전시 규모가 작아질수록 이 필드의 현재성을 담보하는 것 아닐까? 하는 막연하고 짧은 생각에 이렇게 주워담았다.
뉴욕이 미술과 문화의 ��장 첨예한 시작점이라고들 하는데, 사실 여기 2년간 살면서 일상적인 사건들에 익숙해지다보니 뉴욕의 바깥이 뉴욕을 보는 시각이나 뉴욕이 가진 기능적인 면모들에 둔해진 감이 있다. 뉴욕이 많은 분야의 첨단인 게 맞는 것 같은데, 아무래도 일상이 여기 있고 여기서 매일을 지지고 볶다보니 그것을 늘 느끼기엔 감각이 피로해진 것 아닐까.
블로그가 내가 일상이 아닌 뉴욕을 스스로 보고 풀어낼 수 있는 계기가 되면 좋겠다. 내 전달력이 늘어 다른 사람들이 뉴욕 아트 필드의 여린 잎들을 보고 자극을 받을 수 있으면 더 좋을 것 같고.
무엇보다, 꾸준히 열심히 잘 써서 내 감상들을 현금화를 시킬 수 있었으면 좋겠다.
한 주 한 두개씩(을 목표로), 뉴욕 소규모 갤러리들에서 진행되는 전시들에 대한 개인적 감상을 남기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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