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무더운 여름날이었다. 그를 처음 만났던 날은 초록빛으로 물들어버린 촉촉한 세상, 인위적인 땅들 사이에 무성히 자라나 있는 짧은 털들뿐이었다. 내가 그를 만난 것이 고통이었나 슬픔이었나. 이건 그저 기차의 풍경을 바라보며 털어놓는 한 여자의 잔상에 지나지 않는다. 여자는 누군가에게 버드나무의 작은 소녀가 되었고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지나가는 사람이 되었다. 여자는 생각한다. 사랑이란 과연 무엇일까? 죽는 순간에도 사랑을 모르다 가는 것은 아닐까? 사람들이 말하는 사랑은 왜 항상 아픔이 따라다니는 걸까? 아픔이란 왜 존재하는 것일까? 생각이 생각의 꼬리를 물고야 만다.
그 다음 날의 더위는 택시가 신호에 멈추기 전, 브레이크를 밟은 순간부터 멈추기 전까지의 느낌이 지속되는 느낌이었다. 짧고도 강력하며 감지하기 싫은 이 기분이 뭔지, 알 수 없을 뿐이다.
나의 감정에 대한 후회는 없습니다. 그러나 나를 사랑 했던 사람이 한순간에 나에게 이성적인 감정을 잃었다고 하여 속상할뿐입니다. 평생을 같이 하자고 약속했던 사람이 이런 말을 하고 이런 표정을 지을 줄은 몰랐거든요. 내가 마음이 떠났어도 그 사람만큼은 저에게서 안 떠날 줄 알았어요. 저의 자만심이었습니다. 지금 나는 그 사람과 다시 만날 생각 또한 없고 그 사람을 이성적으로 좋아하지도 않지만, 나에게 이년동안 그 사람은 이성이었으니, 이성적 감정이 배경에 있는 이상, 우린 친구는 안되겠지요. 당신은 그러해도 나는 친구가 힘들 것 같습니다. 시간이 지난다면 친구를 할 수도 있겠죠. 그러나 지금은 얼굴을 보면 마음이 약해질까봐 무서워요. 아무래도 헤어진지 얼마 지나지 않았고, 얼마전까지 이성이었던 당신의 얼굴을 보면 조금이라도 약해질까 무서워요. 그런데 사람이 참 웃긴 게 약해져서 붙잡을까봐 무서운 게 아니라, 그렇게 얼굴 보고 잠깐 약해질 내 마음을 느끼기 싫어서입니다. 서로 사람으로서 사랑하긴 하지만, 이성의 감정이 남아있지 않은 우리에게 이별의 연장선 따위는 필요 없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으니까요. 잘 헤어집시다. 사랑은 사랑으로 끝내요. 사랑이 과거가 됐어도 우정으로 변할 일은 없을 것 같습니다. 날 이성적으로 그리워할 게 아니면, 그리워하지도 마세요. ���떤 감정으로 날 그리워하든 나는 떠난 사람이지만, 우리를 그리워할 거면 과거의 우리가 비참해지지 않게 사랑으로 그리워해요. 나도 그렇게 할게요. 지금은 당신이 하나도 그립지 않아요. 그러나 정말 나중에 당신을 그리워하게 된다면 그것은 다른 이유도 아닌 사랑일 거라고 확신해요. 사랑으로 시작해서 사랑으로 끝낸 우리 사이, 우정이 비집고 들어오면 너무 비참한 관계로 끝나잖아요. 당신이 말했던 박수칠 때 떠나가라. 우리 그거 하기로 해요.
얻은 99퍼센트를 버리는 것과 원래 없었던 1퍼센트를 더하면 완벽한 100퍼센트라고 믿기 때문이다. 모든 것을 포기한 후에 '그래 원래 내 인생으로 돌아온 것 뿐이야'라고 단념해버리는 것에 능숙해져, 익숙한 것에 늘 기대어 왔다.
나는 불완전한 1퍼센트에도 행복해하며 안심하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하지만 이런 인생을 걸어온 나에게 안정이라는 것은 앞으로도 찾아볼 수 없겠지. 마음이 불안정하기에 나는 불완전하며 그런 마음으로는 절대 평안해질 수 없다는 것을 안다. 지금 곁에 둔 것을 잃기 싫다는 불안함에 지쳐 모든 것을 져버리는 나를, 그 누가 이해해줄까. 두렵다. 앞으로도 나에게 온전한 안정이 찾아오지 않는다 해도, 내가 지금과 미래에 잃고 싶지 않은 것들을 지킬 수 있을 정도만큼의 잔잔한 안정이 마음에 찾아오길 기도한다.